스티븐 밀러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Split-screen image: left shows student silhouette at podium with trash on ground, right shows man in suit at government desk. Broken mirror effect connects both sides, symbolizing Stephen Miller's transformation.

공감 능력의 부재와 교육의 책임

트럼프 대통령은 새해 들어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체포, 그린란드 합병, 이란 개입 시사 등을 통해 ‘힘의 외교’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국내에서는 강경한 이민 단속을 이어가며 10월 치러지는 중간선거에서 의제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모든 논란의 중심엔 스티븐 밀러가 있다.

미국 언론은 그를 트럼프 행정부의 ‘기획자’ ‘설계자’ ‘대통령의 두뇌’로 부른다. 트럼프 측근 그룹에서는 그를 ‘총리’라고 부른다는 말도 있다. 만 40세의 백인 남성이 트럼프의 대내외 정책을 총괄하는 막후 최고 실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시사지 ‘디애틀랜틱’은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매일 오전 열리는 10시 전화 회의를 정부 참모가 아닌 전시의 장군처럼 주도한다. 변명은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 의견도 용납하지 않는다.”

청소년 밀러의 세계관

진보의 아성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성장한 밀러는 강경 우파 정치 성향을 가진 괴짜였다. 유튜브에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체화하고 진보 진영을 도발하던 그의 청소년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영상들이 남아 있다.

2003년 고교 시절 친구들과 웃으며 찍은 영상에서 그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측근들에 대해 “이상적인 해결책은 그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다. 완전히 죽일 필요는 없다”며 “고문이야말로 생명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찬사”라고 말한다. 다른 영상에서는 학생회 선거에 출마해 “내 쓰레기를 직접 주워야 한다는 소리가 지겨운 건 나뿐인가? 우리에게는 수많은 청소부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히스패닉계 학생들의 언어 능력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 영상들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불편함? 분노? 혹은 “나도 저런 생각을 해본 적 있는데”라는 묘한 동질감?

솔직함과 위선, 그 사이 어딘가

“내 쓰레기를 직접 주워야 한다는 소리가 지겨운가?”

높은 수준의 자아 성찰이 이루어지는 완성된 인간이 되기 전에야 솔직히 쓰레기를 주워야 한다는 소리가 반가울 리 없다. 문제는 이 감정을 대하는 태도다.

누군가는 이런 감정에 솔직하다 못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까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도록 설득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쓰레기를 줍고 싶지 않지만, 그런 말을 해야만 사회적 시선이 자신을 좀 더 도덕적이고 자아 성찰이 되는 수준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마치 그것이 옳다는 것을 뼈속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당신은 이 두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둘 다 맞는가? 혹은 둘 다 논리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옳지는 않은가? 혹은 첫 번째만 맞고 두 번째는 틀렸다든지, 혹은 그 반대인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는 왜 쓰레기를 주워야 한다고 배웠을까? 단순히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답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청소부의 고된 노동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더 설득력 있는가?

서사적 상상력의 부재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민주 시민에게 필요한 핵심 능력으로 “서사적 상상력(narrative imagination)”을 제시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지성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 타인의 내면 삶과 경험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상상력은 문학 작품을 읽고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며 발달한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살아봄으로써, 우리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다면 밀러에게는 무엇이 부족했을까? 청소부의 고된 노동, 이민자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겪는 어려움—이런 타인의 경험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 말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군자답지 않은가.

여기서 군자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일컫는다. 즉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경구에 비춰보면 요즘 정치인들 중에는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 보인다. 모두가 자신을, 자신만을 봐달라고 전 세계를 향해 목청을 높이고 있지 않은가?

밀러의 10시 전화 회의에서 “변명은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 의견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태도는 어떤가? 이것이 강력한 리더십인가, 아니면 공감 능력의 부재인가?

공감은 배울 수 있는가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동정이란 감정을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인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 즉 동정이야 말로 공감의 첫걸음 아닐까? 누스바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학과 예술이 바로 그 학습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고,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살아보고,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점차 타인의 이야기를 지성적으로 읽어내는 능력을 기른다는 것이다.

상대의 의견에 공감하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능력을 지닌 것이야말로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완전히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토론은 모두가 함께 더 나은 결과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협업이 아닌 경쟁, 즉 누구의 의견이 더 우수한가에 치중하고 있다. 이런 논쟁적 토론 문화 아래에서는 공감은 쓸데없는 사치가 되고 만다. 승리가 목표일 때,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약점이 된다. 밀러가 학창 시절 내내 보여준 태도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서사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단순히 “남을 배려하자”는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직접 청소부의 일을 경험해보고, 이민자의 언어 습득 과정을 체험해보는 것이 필요한가?

더 나아가, 누스바움이 제시하듯 다양한 문학 작품을 통해 여러 계층, 여러 배경의 사람들 삶을 간접 경험하는 것이 필요한가? 단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의 감정을 느껴보는 경험 말이다.

적으로 가득 찬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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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사회(직장, 지역, 국가 등)에 속해 살아가려면 나만이 옳고 모두가 틀렸다는 생각으론 힘들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이 드는 세상이 얼마나 살기 힘들지 생각해보라.

스티븐 밀러는 자신과 생각이 같은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 인류가 적이나 없애야 할 상대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 대부분은 이런 ‘쓰레기'(스티븐 밀러의 관점에서)를 청소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그가 그토록 유튜브에서 “누군가 청소를 할 사람이 있는데 내가 왜 해야 하냐”고 항변했던 바로 그 쓰레기 치우기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일을 평생 하게 된 셈이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들

밀러 같은 인물이 탄생한 것은 개인의 문제인가, 교육 시스템의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 전체의 문제인가?

만약 밀러가 청소년 시절 다른 환경에 있었다면—예를 들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깊이 교류하고, 그들의 삶을 직접 경험해볼 기회가 있었다면—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더 불편한 질문: 우리 중 몇이나 밀러의 청소년 시절 발언에서 자신의 모습 일부를 발견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와 밀러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지 그가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했고 우리는 속으로만 생각했다는 것뿐인가?

공감은 타고나는 것인가, 배우는 것인가? 만약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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