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이란 무엇인가?

파편화된 인간의 모습, 기하학적 추상화 이미지
이 이미지는 Gemini (Imagen 3)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방송(放送)’이란 단어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의 전자기기를 통해 음성과 영상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라인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 단어를 조사해 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의미가 더 담겨 있습니다.

방송(放送)

라디오나 텔레비전 따위를 통하여 널리 듣고 볼 수 있도록 음성이나 영상을 전파로 내보내는 일.

『역사』 죄인을 감옥에서 나가도록 풀어 주던 일.

조선시대까지 ‘죄인을 감옥에서 풀어 주던 일’을 가리키던 말이, 어떻게 오늘날 ‘미디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일까요?

이 지점에서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우리가 ‘풀어 보낸다(放)’라는 최초의 의미는 알지도 못한 채 이 ‘방송’이란 단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정말 그런가?”라는 의문을 품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를 읽던 중에, 책의 뒤표지에 실린 홍보 문구가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개인은 해체되고 삶은 추상화된 현대.“

비평서나 철학서에나 적혀있을 법한 문구입니다. 약간은 격조가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다시 곰곰이 읽다 보면, 과연 내가 ‘해체’나 ‘추상’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추상화된 현대’라는 표현은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깁니다. 모호하고, 불분명하며, 실체가 없는 공허함. 아마도 추상미술 작품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이 그러하다는 생각에 ‘추상적’이란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 그림이 뭘 그린 건지 모르겠다”라고 답답해지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함께 솔직해져 볼까요? 과연 우리는 이 ‘추상’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걸까요? 최소한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추상(抽象)의 사전적 의미

방송의 뜻을 찾아보았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추상’도 검색해 봤습니다.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상(抽象)『심리』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던 ‘모호함’과는 아무 공통점이 없습니다. 단어를 이루고 있는 한자를 하나씩 살펴보면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보입니다. 한자 추(抽)는 “무언가에서 일부를 뽑아내다”를, 그리고 상(象)은 코끼리의 모습에서 생겨난 상형 문자로 ‘모양·형상’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추상의 의미는, ‘사물의 형상(象)에서 본질을 뽑아내는(抽)’일이 됩니다.

추상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Abstract의 어원도 한번 살펴볼까요? 찾아보니 abstract의 어원은 라틴어 abstractus로 ‘abs(분리)‘와 ’trahere(끌어내다)’가 결합 되어 ‘핵심을 끌어내 분리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역시 불필요한 외형을 걷어내서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조사해보니, ‘추상(抽象)’이라는 단어도 근대 일본에서 서양에서 사용하는 abstract라는 단어의 의미를 옮기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한자어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옛날부터 동양에 있던 말“이라 여겼던 생각이 잘못이었던 것이죠.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엄밀하게 따져보자는 이 기사의 의도를, 본의 아니게 예시로 선택된 단어가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단어를 분석해 보면 다음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추상은 결코 애매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실에서 본질만을 남기는 전정한 사고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예에서 보듯, 우리가 관성적으로 ‘알고 있다’라고 확신하는 단어일수록, 분명하게 그 의미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잘 안다‘라고 믿는 단어를, 우리가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마치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며, 이해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늘 의심해 봐야 합니다.

‘특성(Qualities)’은 무엇인가?

다시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로 돌아가 볼까요? 소설의 제목 《특성 없는 남자》에 담겨 있는 ‘특성’이란 단어는 과연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파악하고자 할 때 보통 그들이 지닌 ‘특성(Qualities)’, 즉 직업·성격·지위 같은 면들을 살펴봅니다. “누구누구는 성실한데, 역시 공무원이었어”, “누구누구는 성격이 예민한데 예술가라서 그래.”처럼 말이죠.

이런 언어들은 꽤 명확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한 인간을 ‘언어적으로 약속된 몇 개의 이름표를 붙여서 특정 틀 아래에 분류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과연 누군가의 본질을 보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에게 붙어있는 ‘이름표’를 보고 판단하고 싶은 것일까요?

철학자 니체는 유고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서 ‘진리’라는 개념에 관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주장을 합니다.

”진리란 은유, 환유, 의인화의 총체, (중략) 한마디로 말해, 오랜 사용 끝에 민족에게 확고하고 타당하며 구속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은유, 환유, 의인화의 유희이다. 진리란 환영들이며, 그것들이 환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환영들, 마모되어 감각적 힘을 잃어버린 은유들이다.“

즉, 우리가 흔히 객관적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어쩌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수사’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 역시 현대인이 자기만의 고유한 내면이 아니라, 사회가 건네준 ‘특성들의 집합체’로 전락했음을 고발합니다. 그가 소설에서 만들어 낸 주인공 울리히, ‘특성 없는 남자’의 캐릭터는 절대 무능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정관념에 빠진 사회적 시선과 선입견에 개의치 않고, 세계의 본질 너머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순수하게 뽑아내는 능력인 추상(abstract)을 지닌 인간이었던 것이죠.

‘이해’를 정말 이해하고 있나?

다른 사람의 논리나 표현을 정확히 옮길 수 있는 능력은 분명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소화하지 못한 타인의 사상은 한낱 ‘정보’일 뿐, 결코 나의 ‘지식’이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앎이란 정보를 내 생각으로 다시 뽑아내는 일, 즉 남의 형상(象)에서 나에게 본질로 다가오는 것을 뽑아내는(抽) 또 하나의 추상 작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추상을 이해하는 일과 무언가를 진짜로 이해하는 일은, 실은 같은 행위입니다. 이해하려는 대상(개념, 사물, 타인 등)의 외부를 둘러싼 장막을 걷어내서 실재, 또는 대상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는 적지 않은 훈련과 노력이,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포용력이 요구됩니다.

왜 현대 예술은 ‘추상’일까

진정한 인식을 향한 이 도전은, 예술사에서도 거듭 반복됩니다. 칸딘스키가 추상미술을 향해 나아간 것은 단지 기존과 다른 독특한 형태와 형식을 추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얻은 영감으로, 칸딘스키는 음악은 그림이 될 수 있고, 그림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후 그의 그림들은 점차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미술로 바뀌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더 깊고 본질적인 소통을 위해서였는데, 그는 기존 미술 양식으로 불가능했던 감정의 전달이, 추상미술을 통해서는 음악처럼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악에서 쇤베르크가 무조음악(12음 기법)으로 조성 체계를 해체한 것 역시 단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자 함이 아니라, 전통적인 화성법에서 경시되던 음들이 갖는 숨겨진 본질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 담긴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이들에게 ‘추상’은 명확함이 아닌 애매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추상 예술이 정말 모호해서일까요? 어쩌면 많은 이들이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선입견‘이라는 필터에 의존한 채, 세상의 본질을 읽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 탓은 아닐까요?

과연 우리가 ‘난해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어려운 것인가요? 혹시 기존의 언어 체계와 선입견이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각인된 언어

이제 다시 처음의 소설 홍보 문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개인은 해체되고 삶은 추상화된 현대.“

이제 이 문장이 조금은 다르게 읽히나요? 무질이 소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한 것은 ‘추상화된 삶’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몇 가지 특성으로 축소 시키는 사고의 관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을 설명하려던 홍보 문구는 오히려 무질의 생각을 애매모호하게 변질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추상’을 모호함과 공허함이란 의미로 바꿔버린 것이야말로, 무질이 그토록 지적한 다양한 인간의 사고와 특질을 몇 가지 언어로 일반화하고 있는 오류인 셈이죠.

우리는 사회가 붙인 이름표 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 남과 다른 주장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스스로 사고해야 하는 어려움을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게으름 때문에, 진정한 ‘나’의 본질이 설 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모호한 것은 ‘추상’이 아닙니다. 본질을 명확하게 담아내지 못하면서, 마치 그런척하는 대중에게 ‘각인된 언어‘야말로 우리의 사고를 모호함에 빠뜨립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라고 믿어 온 것들을 정말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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