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와 ‘어떻게’에 관한 생각들

나침반(Why)과 지도(How), 서재에서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남성
Google Gemini로 작성되었습니다.

요즘 서점에 들를 때마다 눈길을 끄는 글자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왜’입니다. <왜 일하는가?>, <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가?>, <왜 당신은 거기 있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등등, 대형서점의 서가를 대충 훑기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책의 제목에 ‘왜’가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관련 책에도, 자기계발서에도, 정치 서적에도, 심지어 비판적 사고를 다루는 교육 및 철학 관련 서적까지, 마치 제목에서 ‘왜’가 없으면 책이 아니기라도 한다는 듯 ‘왜’를 애지중지 다루고 있습니다. 아동 코너로 걸음을 옮기니 오랜 기간 인기 도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Why?》 시리즈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많은 ‘왜’가 들어간 책들을 보다가, 갑자기 우리도 일상에서 하루에 몇 번씩 ‘왜’가 들어간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그런 일을 한 거야?”,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왜 우리나라 정치는 수준이 낮은 거야”, “왜 우리나라 축구협회는 감독을 저렇게 뽑은 거야” 등등.

오랫동안 우리는 ‘왜’라고 묻는 걸 좋은 질문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사실 ‘왜’라고 묻는 것은 대부분 좋은 질문이 틀림없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새로운 발견은 늘 기존의 고정 관념을 의심하는 ‘왜’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문득 이런 궁금함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매일 던지는 그 질문 속의 ‘왜’들은 모두 같은 의미일까? 그리고 ‘왜’라고 묻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같은 소리 하지만 다른 의미

“하늘은 왜 파래?” 아이들이 흔히 묻는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그 이유를 모르면 무척이나 신비하고 어려운 고민에 속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지구 외부에서 지구를 향해 오는 빛(태양 광선)이 지구의 대기층을 지나면서 산란이라는 물리적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빛의 입자성을 알려주는 재미있는 예시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그 회사는 왜 실패했을까?” 이 질문의 답도 쉽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창업자가 무능해서라고 대답할 것 같고, 누군가는 경쟁사나 바뀐 정부의 정책을 답으로 내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그 대답들은 모두 각자의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은 창업자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경향이 클 것이고, 진보적인 사람은 사회적 구조나 잘못된 시스템을 지적하려고 할 것 같습니다. 경영학 교수라면 창업자의 지도력, 재무 관리 능력 등을 언급하고 싶을 것이고, 벤처 투자가라면 시장의 경쟁 상황을 원인으로 삼으려 들 수도 있겠죠. 그중 어떤 것이 정확한 원인일지는 모르지만, 답을 내놓은 사람들 모두는 자신의 답에 만족하며 자신만이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아는 것일까요?

시선을 돌리면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만약 질문이 “그 회사는 왜 실패했을까”가 아니라 “그 회사는 어떻게 실패하게 되었을까”라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까요?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기간별 현금 흐름 상황을 확인하고, 핵심 인력의 역량이 충분했는지를 확인할 것이며, 제품은 과연 시장에서 차별성을 보여주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질문과 달리 하나의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원인을 좀 더 촘촘히 분석하기 위해, 사업의 과정을 훑으며, 단계별 상황들을 살펴보게 되지 않을까요? 이런 과정을 통해 떠오른 실패의 원인이 어쩌면 우리의 흥미를 끌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같은 실패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데이터를 구축하기엔 적절해 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완벽해 보이던 ‘왜’에 ‘어떻게’라는 추가 질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가 많이 쓰이는 이유

우리는 왜 이렇게 ‘왜’를 많이 묻는 것일까요. 혹시 ‘왜’라고 묻는 행위가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어쩌면 이런 특성이 ‘왜’의 약점은 아닐까요?

매일의 일상적인 삶은 얼핏 보기에 평범하지만, 그 속에 숨은 내용들이 실제로는 상당히 복잡하게 엮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변수에 우연까지 끼어들면서, 내 삶을 둘러싼 이야기들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예측 불허인 경우가 많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현실의 복잡성 앞에서 우리는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변형시키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형된 이야기의 중심에는 대부분 내가, 내 관점이 놓여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계를 나의 선입견을 통해 바라보며, 그렇게 유추한 이해에 집착하게 됩니다.

인지심리학에서 ‘설명 깊이의 착각(Illusion of Explanatory Depth)’이라고 부르는 개념이 있습니다. 지식의 착각이라고도 하는데, 복잡한 인과 관계를 다루는 지식일수록 실제로 잘 모르면서 마치 잘 아는 것처럼 믿는 인지 편향 현상을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착각이 정치적 태도 등에도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한 심리학 연구는 사람들에게 특정 정책(예: 건강보험제도나 탄소배출권 거래제 등)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7단계(매우 잘 이해함에서 매우 잘 이해하지 못 함)로 먼저 답하게 한 뒤, 그 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잘 이해한다고 대답한 사람들조차 정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테스트 이후에 사람들이 갖고 있던 특정 정책에 대한 극단적 찬반 태도마저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이 정책을 지지하나”라고 물었을 때는 확신에 차 있던 사람들이, “이 정책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접하며 스스로 무지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나의 고정관념과 다른 주장을 접하게 되면, 감정적인 흥분상태에 빠지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라는 질문을 내놓습니다. 이런 질문에 담긴 ‘왜’는 이처럼 호기심이 아닌, 상황이 내 감정과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 만들어 낸 불만에 가깝습니다.

‘어떻게’?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보겠습니다. 1854년 런던에서 콜레라가 창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전염병이 병원균을 품은 ‘나쁜 공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왜 이런 병이 생기는가?”라는 의혹에 각자가 그럴듯한 설명을 지어내며 생겨난 오해가 통념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죠. 그런데 당시 의사 존 스노우는 다른 이들과 다른 관점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사람들이 전염되는 경로가 궁금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감염되는 것이지?”라는 질문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환자가 발행한 지역을 지도에 표시하며 자세히 조사합니다. 그리고 특정 지역에서 환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찾아냅니다. 그는 그 지역의 수도 펌프에 문제가 있으리라 추정해 손잡이를 제거하도록 설득합니다. (다만 훗날 역사가들은 그 무렵 유행이 이미 잦아들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손잡이 제거가 콜레라 유행을 극적으로 멈춰 세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스노우는 결국 오염된 물이 감염 원인 임을 데이터로 찾아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수인성 질병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를 실제로 풀어낸 질문은, 문제의 배경에 대단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왜’가 아닌, 감염이 일어난 실체적인 과정을 추적한 ‘어떻게’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 사실로 ‘왜’가 ‘어떻게’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실 ‘왜’라는 단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토요타가 시작한 현장에서 문제를 찾는 ‘5 Whys’ 기법은 문제의 근본 원인에 닿을 때까지 “왜?”라는 질문을 다섯 차례 반복하며 해결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방식은 겉보기엔 ‘왜’를 쓰지만 실제로 ‘어떻게’를 찾아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라는 단어 자체가 아니라, 질문을 한 번 던지고 그럴듯한 답 하나를 찾아서 거기에 만족하는 우리의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왜’든 ‘어떻게’든, 단 한 번의 질문과 단 하나의 답으로 서둘러 봉합해버리면 똑같이 위험해지는 셈이죠.

그렇다고 ‘어떻게’만 물어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역시 혼자서는 방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많이 들어보셨죠. “어떻게 더 빠르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 “어떻게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효율만을 따지다 보면, “도대체 우리는 이 일을 왜 해야 하지?”라는 더 중요한 질문을 놓치기 쉽습니다.

2차대전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던 한나 아렌트의 깨달음이 그점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아렌트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이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고, 심지어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군대를 지휘하고 관리하는 부분에서 뛰어난 행정적 능력을 발휘하며 점차 높은 자리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주어진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던 그는, 유태인 학살 같은 문제도, 그것의 의미나 목적에 대해 스스로 깊이 반문하지 않은 채, 빠르고 효율적인 집행에만 집중합니다. 그런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자신이 그저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며, 심지어 칸트의 도덕 철학까지 끌어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이런 아이히만에게서 한나 아렌트가 발견한 것은 사악한 의도가 아니라 ‘사유의 부재’였습니다. 타인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되짚어 보는 내적 사유와 타자에 대한 공감이 불가능한 상태 말입니다. 엄청난 폭력을 효율과 관리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면서도, 그는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해낼지만 물었을 뿐, 그 일을 ‘왜’ 해서는 안 되는지를 스스로 사유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어떻게’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 질문에는 여전히 ‘왜’가 필요합니다.

적절하게 질문하기

어쩌면 여러분은 ‘왜’와 ‘어떻게’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 글에서 다룬 ‘왜’조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회사는 왜 실패했을까”처럼 이미 벌어진 일의 원인을 캐묻는 ‘왜’가 있었고, 아이히만에게 없었던, “이 일을 왜 해서는 안 되는가”처럼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하게 하는 ‘왜’가 있습니다. 앞의 ‘왜’는 자기만의 시각으로 만들어져 실제 지형을 잘못 표기한 지도일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한 지도 제작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라고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으로 해야 하나, 어디에서 해야 하나 등 세세한 필요 사항들을 묻고 확인하게 해주는 ‘어떻게’ 말입니다. 그에 반해 뒤의 ‘왜’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잘못된 ‘왜’만 붙들고 있으면 잘못 그려진 지도에 갇히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어떻게’만 고집한다면 지도를 완성해 놓고, 방향을 알려줄 나침반 없이 헤매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질문을 더 많이 던지고 있었나요? 아직 모르는 게 많고 생각이 순수한 아이들을 떠올려 보세요. “왜 하늘은 파래?”라고 묻다가도 금방 눈앞에 보이는 자전거를 보며 “이걸 어떻게 타?”라고 묻는 순진한 아이들을요. 그 아이들은 호기심도 많고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인 된 우리들은 이미 체면과 고정 관념의 포로가 된 상태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질문을 던지셨나요? 여러분을 답답하게 하는 사회 문제나 누군가의 행동을 보며, 한 번쯤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자신을 향해서요. 과연 지금 내가 던진 ‘왜’가 정말로 궁금해서 던진 것인지, 아니면 내 관점과 다른 현상이나 문제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답답함인지 직접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혹시 ‘어떻게’만 부지런히 묻느라, 애초에 이 일을 ‘왜’ 하고 있었는지는 잊어버린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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