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 침대에 누웠지만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놓기 어렵다. 포털 메인에 걸린 자극적인 제목 아래로 줄지은 댓글이 보인다. 화면을 흩던 중에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손가락이 멈춘다. 올라온 댓글 중 하나에서 논리적 허점을 찾은 것이다. 재빨리 댓글 창에 내 생각을 적어 넣는다. 정확히 허점을 찌른 듯한 느낌이 들며 뿌듯해진다. 이렇게 흥분 상태에서 올린 댓글은 대부분 빼쪽하게 상대를 향한다. 누군가 그 댓글 문장이 너무 날카롭지 않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개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비판했을 뿐이다.”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그저 문제를 지적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혹시 ‘비판’과 ‘비난’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을까.
똑같이 ‘비’로 시작되는 이 두 단어는 하지만 무척이나 다른 의미를 각각 담고 있다.(주.1) 두 단어 모두 내가 아닌 타자를 향하지만, 비판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주시하며 상대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비난은 그와 달리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한다. 어쩌면 비난은 대상을 ‘우리’라는 내가 속한 사회에서 제외하려는 시도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비판은 행동의 결과에 집중하지만, 비난은 상대의 의도와 심리 등 우리가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는 영역까지 겨눈다. 이런 차이로 인해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떻게’를 찾고자 노력하는 비판과 달리, 비난은 단지 내가 상대보다 우위(도덕적, 지적)에 있음을 입증하고자 할 때가 많다.
물론 현실 속 우리의 말과 행동은 두 단어가 지닌 차이만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때로는 강한 비판이 필요하기도 하며,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에는 단호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럴 땐 정당한 비판조차 비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표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생각이 향하는 방향이다.
‘희생양’을 찾는 사회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는 그 배후에 어떤 원인이 있을까를 분석하기에 앞서 문제를 책임질 사람부터 찾기 바쁘다. 어떤 정책이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면 과정상의 문제인지 시스템적인 요인이 있는지 등 실패의 원인을 살피기보다 관련 공무원이나 정치인을 도마 위에 올리기 바쁘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실수를 저지르면, 설사 그 실수가 승패를 가르지 않았더라도 해당 선수와 심지어 가족의 SNS에까지 몰려가 인격적 모욕을 가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다 보면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보다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에만 관심을 두는 사회가 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사실 이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오래전부터 희생양을 만들며 공동체가 처한 긴장을 해소하려 해왔다. 훗날 여러 연극과 드라마에 영감을 준 ‘세일럼 마녀재판’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좋은 예이다. 문제는 왜 이런 경향이 현대에 와서 더 심각해지고 있는가일 것이다. 역사를 통해 유사한 문제를 이미 확인했음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원인 중 하나로 인터넷을 들 수 있다. 짧은 영상 하나, 짧은 글 하나로 일면식도 없는 수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이 됐다. SNS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플루언서라면 대중을 움직여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게 하거나 반대로 맹목적으로 떠받들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영향력이 큰 소수에게 다수가 쉽게 휘둘리는 것이 온라인 환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파편화 되어가는 관계는 소속감의 부재를 불러오고 이는 우리에게 다수가 선택한 결정에 편승하지 않으면 내가 소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기도 한다. 결국 온라인뿐 아니라, 현대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이 우리가 ‘희생양’의 사정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다수와 함께 손가락질하는 쪽을 선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재생산되는 소문들
과거에도 물론 소문은 존재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라는 말을 떠올려 보라.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소문은 언제나 진위와 무관하게 퍼져나간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단지 ‘어처구니없는 가짜 뉴스가 만들어진다’가 아니다. 조작된 뉴스는 사실 여부를 판별하기 훨씬 전에 빛의 속도로 전 세계를 동시에 파고든다. 그런 뉴스가 소셜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순간 진위와 관계없이 새로운 뉴스의 원료로 사용된다. 가짜 뉴스가 또 다른 가짜 뉴스를 낳는 것이다. 새로운 가짜 뉴스는 이전 뉴스를 근거로 내세우며 사실임을 주장하고, 이전 뉴스의 유명세를 진위의 증거로 삼는다. 뉴스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분열하며, 재생산을 거듭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뉴스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대중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뉴스가 애초에 잘못됐다는 점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산되는 형식 역시 진위 파악을 어렵게 만든다. 특정 사건을 바탕으로 재생산된 SNS 포스팅은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원본에서 자극적인 부분만 잘라낸다. 본래의 맥락은 사라지고 재생산자의 자의적 해석만 남는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짧은 영상이나 글은 설사 그 일부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
판단은 빛의 속도로
탄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는 이런 뉴스를 대중들이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성질 급한 우리의 감정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실 확인 과정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카너먼이 설명하듯, 우리의 뇌는 낯설고 검증이 필요한 정보보다 이미 자주 접해 익숙해진 정보를 진실에 가깝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검색량이 많고 자주 눈에 띄는 뉴스일수록 이 착각의 덫에 걸리기 쉬운 셈이다.
비판, 즉 객관적 평가는 수집한 증거를 바탕으로 편견 없는 추론을 거쳐 내려져야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감정적 편견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린 후 그 결론에 들어맞는 증거만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은 <보헤미안 스캔들>에서 홈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I never guess. It is a capital mistake to theorize before one has data. Insensibly one begins to twist facts to suit theories, instead of theories to suit facts. — Sherlock Holmes in Sir Arthur Conan Doyle’s, A Scandal in Bohemia. – 나는 절대 추측하지 않습니다. 데이터를 얻기 전에 추론부터 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을 이론에 꿰어 맞추기 시작하거든요. 이론을 사실에 맞춰야 하는데 말이죠.
그렇다. 최종 평가는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한 뒤 내려야 하지만, 우리의 DNA 속에는 내 입맛에 맞는 평가부터 내리려는 습관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번 판단을 내리고 나면, 그 뒤에 등장하는 어떤 증거도 판단을 수정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기존의 판단을 정당화하는 재료로만 소진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다양한 생각을 포용하려는 태도는 사라지고, 자신의 확신만 강화하려는 의지만 남겨진다.
참을 수 없는 비난의 가벼움
비판은 듣는 사람뿐 아니라 하는 사람에게도 상당한 불편함을 안긴다. 상대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한 뒤 문제의 원인을 다양하게 분석해야 하고, 더 나은 대안까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비난은 상대적으로 쉽다. 대상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의 약점만 물고 늘어지면 그만이다. 이미 답을 정해놓고 묻는 시늉만 하면 되니, 온라인에서 같은 편을 모으기도 훨씬 수월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묻기보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나”만 따지면 된다.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잘못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만 이야기하면 된다. 그래서인지 비난은 비판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는다. 감정적 편향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논점은 점점 핵심에서 멀어진다. 문제를 발견해도 원인에는 관심이 적으니, 문제를 만들어 낸 구조적 오류는 그대로 방치되기 일쑤다.
무엇이 문제일까
오랫동안 익명성이 온라인의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익명성만이 유일한 문제의 원인일까. 온라인 기업의 매출은 사용자의 클릭 수와 직결돼 있다. 그렇다면 온라인 기업은 대중의 관심을 끄는 콘텐츠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설령 그 콘텐츠가 사실이 아닌 선동이나 소문에 기반을 두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런 이유로 대중에게 공급되는 콘텐츠는 차분한 분석과 사고를 유도하기보다 빠르게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이런 흐름에 잘 들어맞는 소재 중 하나가 바로 누군가를 대상화하여 비난을 집중시키고 대중적 공분을 끌어내는 것이다. 분노를 촉발하는 콘텐츠는 또 다른 분노를 부르고, 그렇게 생겨난 분노는 재공유되며 점점 몸집을 불린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며 오늘날 대중의 사고와 집중력은 점차 사라져간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상대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할 수 있는 지구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런 탓에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많은 이벤트는 실상 말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고대의 검투사들처럼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상대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 대결에서 우리는 엄밀한 논리도 다양한 관점도 찾아낼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를 무너뜨리고 우리 진영의 승리를 이끌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에서도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편이, 적어도 같은 진영 안에서는 더 높이 평가받게 된다. 이처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보다 상대의 약점을 날카롭게 후비는 능력이 더 주목받는 사회라면, 비판보다 비난이 활개 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비판을 되살리자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수결을 밀어붙이면 소수를 배제하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민주주의가 갖는 진정한 차별성은 작은 의견도 무시하지 않고 모두의 생각을 수렴하고자 노력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건설적인 비판은 꼭 필요하다. 선출된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을 감시해야 하고, 공리주의적 사고에 매몰되어 소수가 배제되는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비난이 비판을 압도한다면, 그런 사회는 건강하지 않을 것이다.
맹목적인 비난은 상대의 침묵을 강요하지만, 비판은 건전한 토론을 도출한다. 서로의 생각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더 견고해질 수 있다. 질문과 답변, 그리고 재반박을 거치며 각자의 생각이 수정되고 시각이 넓어지는 과정에서 사회는 조금씩 더 나은 공간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비난의 목소리가 건전한 비판을 집어삼키고, 다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소수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려는 경향이 커진다면, 사회는 치유하기 힘든 병을 앓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비난을 가하는 쪽은 종종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다. 그러다가도 자신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순간에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사람이 자기의 처지가 바뀌었다고 표현의 자유를 지지했다가 반대했다가 하는 태도는 결코 논리적이라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몫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고치기 위한 말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내 감정을 거스르는 이들을 그저 ‘우리’ 밖으로 밀어내기 위한 말을 할 것인가.
다시, 침대에 누워 댓글을 쓰려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손끝은 이미 댓글 입력창 위에 놓여 있고, 방금 적은 문장 하나가 등록 버튼을 기다리고 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침표를 찍기 전에 쉼표를 한 번 떠올리는 짧은 정지일지도 모른다. 지금 쓰려는 이 문장이 건설적인 비판인지 아니면 단순한 비난인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스스로 되묻는 사유의 시간 말이다.
당신의 문장은 상대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질문인가, 아니면 이미 답을 정해놓은 선고인가.
- 비판은 ‘비평할 비(批)’에 ‘판단할 판(判)’으로,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한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반면 비난은 ‘비방할 비(非)’에 ‘어려울 난(難)’으로,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 나쁘게 말한다’라는 의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