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의 메인 화면을 보다가 한 기사에 관심이 생겨 클릭했다. 기사가 끝난 뒤엔 어김없이 긴 댓글 리스트를 발견하게 된다. 기사의 핵심 내용엔 관심이 적고, 대부분은 기사를 쓴 기자나, 기사에 올라온 대상을 상대로 비난을 퍼붓는 내용이다. 비슷한 모습은 여기저기서 목격된다. 특히 대중적 인기가 높은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룬 글이라면 수백, 수천의 댓글이 달리고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댓글마다 그 내용 하나하나에 시비를 거는 대댓글이 달리고 다시 거기에 반격을 가하는 댓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토록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포스팅이라 할지라도 며칠, 혹은 몇 주 정도가 지나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기사는 조용히 우리 시선에서 사라진다. 언론사 또는 포털 서버의 어딘가에 파묻힌 채, 마치 태평양 심연에라도 가라앉은 듯 세상에서 사라져간다. 사람들은 그저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떠나간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이런 상황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치적이거나 또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발언에 관한 글이라면, 대중의 반응은 단지 비난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전쟁이 발발한 듯 상대를 상처 입히기 위한 날카로운 언어들이 등장한다. 어떻게 같은 말과 생각을 나누는 사람끼리 단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이란 이름을 이토록 쉽게 붙일 수 있을까?
그리고 나와 다른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해 우리는 왜 이렇게 분노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까지 세상을 내 마음대로 통제하려 안달하는 것일까?
물론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필요하다. 건설적인 비판도 필요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을 무조건 피할 수도 없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비판의 목적은 잘못을 바로잡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상대의 완전한 항복을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비난을 받는 대상이 사과하더라도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더 많이 더 진지하게 사과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어떤 해명도 쉽게 믿어주지 않는다. 그 사람의 과거를 샅샅이 뒤져 이번 사안과 관련 없는 일들까지 전부 끄집어낸다. 결국 비난의 대상이 공적 공간에서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런 현상을 보고 있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공정, 정의 같은 바르고 참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기를 원하는 것인가?
이에 관해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마음에 안들면 울어 버릴까?
그녀는 갓난아기를 예로 든다. 채 백일조차 되지 못한 인간 아기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에 놓여있다. 배가 고파도, 축축하고, 춥고, 덥고, 몸이 아파도,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불안감이 증폭되고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그런데 울음을 터뜨렸더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누군가(대부분 엄마나 할머니 등 아기의 편인 양육자다) 달려와서 아기의 불편을 감소시켜 준 것이다.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안아준다. 자연스럽게 울음이 사라지고 평온이 깃든다.
이런 경험을 통해 아기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기 시작할까? 아마도 자기가 울면 누군가가 달려와 자신의 세상을 좀 더 편하고 안락한 쪽으로 바꿔준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에 인간처럼 오랜 기간 완전한 무력 상태에 놓인 종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 인간은 내가 울면 세상이 움직인다는 원초적인 체험을 통해 누군가를 움직여야 나의 필요가 충족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무력하다. 하지만 나에겐 나의 필요를 채워줄 누군가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을 통제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무척 중요할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험을 ‘유아적 전능감(infantile omnipotence)’이라고 설명해 왔다. 당연히 아기가 전능하지는 않다. 오히려 엄청나게 무력하다. 그런데 자신의 울음에 누군가가 지속해서 응답하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반대로 무력함을 전능으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The Monarchy of Fear)』이란 저서에서 이런 전복적 상황을 정치적 감정의 뿌리로 해석 해낸다. 그녀는 신생아의 완전한 무력함 위에 공포라는 감정을 세우고, 배고픈 척 울음만으로 주변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아기를 ‘제왕적 아기(imperious baby)’라 부른다. 그리고 이 아기의 본능을, 지배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는 절대군주 위에 포갠다.
그렇다면 오히려 가장 무력한 존재일수록 자기의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이런 가정이 바로 누스바움의 출발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즉 성장을 이 관점에서 본다면 무엇을 의미할까?
성장한다는 것은 내가 운다고 누가 달려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일까?
아기의 상태에서 벗어난 후 모두가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서는 운다고 누가 달려와서 날 도와주지 않는다. 또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은 당연히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이런 각각의 생각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설사 내가, 내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반드시 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인식이 생기고, 타자의 생각을 인정하게 되는 것,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아내야 하는 것, 이런 것들이 결국 나의 성장을 증명하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는 정말 이런 사실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불안해질수록 더 통제하고 싶어진다
현대인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자.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중이다. 예전처럼 열심히 일한다고 지금보다 나은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정치, 경제, 직업 안정도, 인간관계 등 나를 둘러싼 대부분 환경이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삶을 예측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결국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고 한다. 아이들이나 반려동물의 애착 인형이나 애착 담요를 생각해 보라. 아이들에겐 할아버지 할머니도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스스로 삶을 통제하긴 어렵지만, 그 대신 통제할 수 있는 어떤 대상물이나 타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삶은 통제할 수 없지만, 저 사람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시작된다. 온라인에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은 이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 삶의 복잡한 문제를 제쳐놓고 대신 통제할 타자를 찾는 과정 중 하나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누군가를 향한 비난을 쏟아내다 보면 마치 나에게 어떤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누군가의 사과를 이끌고, 누군가의 잘못을 입증하는 동안 내가 처한 문제들이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없나?
이런 현상이 바로 누스바움이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누스바움의 주장에 따르면 두려움이란 감정은 단순히 인간을 움츠러들게 하기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종종 공격적 성향을 드러내게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을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분노로 바꿔버리면, 적어도 잠깐은 내가 무엇인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누군가를 향한 지나친 분노를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내가 정말 저 사람 그리고 저 사람의 행동 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 혹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현실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디지털 환경이 부여한 힘
정보의 고속도로라고 불리며 급속하게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바꾸던 디지털 문화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인간의 통제 성향에는 치명적 결과를 불러온 셈이다. 과거에는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능력이 필요했다. 공론장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했고, 대중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권위도 필요했다. 더구나 잘못된 비난을 했다가는 반대로 내가 타격을 입을 우려도 컸다. 모든 일은 나를 드러낸 상태에서만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은 이 모든 조건을 단숨에 바꿔버렸다.
이제는 누구든지 특정인을 비난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키보드 또는 휴대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는 게 전부이다. 댓글을 달고 다른 이의 비난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싫어요’를 누르며, 마음에 안 드는 댓글을 신고하는 일 등, 모든 일은 클릭 한 번이면 끝난다. 커뮤니티라는 옵션은 더 이상 내가 한 명의 개인일 필요가 없음을 보증한다. 아무도 모르는 익명의 개인들이 모여 거대한 집단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묘한 성취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평범한 개인이 유명인에게도 실제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런 디지털 환경은 우리의 분노와 통제 욕구를 너무 쉽게 증폭시킨다. 플랫폼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만들어 낸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분노와 혐오를 유발하도록 기획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원인이 오직 플랫폼에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본질은 우리 스스로 타인을 견뎌내는 포용성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나와 다른 의견은 견딜 수 없어
특히 정치 영역에서 이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의 의미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며 점점 더 그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 같다. 온라인상에서 우리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틀린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심지어 일상에서 두 그림 사이의 차이를 찾는 퍼즐 게임조차 습관적으로 ‘다른 그림’이 아닌 ‘틀린 그림 찾기’라고 부르곤 한다. 차이를 곧 ‘오류’이자 ‘교정해야 할 결함’으로 인식하는 언어적 관성이 우리 사고 밑바닥에 깊게 배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다름이 틀림으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서로가 다른 건 포용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만, 틀린 건 고칠 수 없다면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어느 순간 우리는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져야 한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말은 곧 의식이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없애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함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는 점에서 같더라도 모든 게 똑같을 수는 없다. 각자 다른 삶을 경험하고, 다른 기억을 품고,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 방법을 궁리해서 민주주의란 제도를 만들었다. 결과 모두가 함께 할 해결책은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많은 우리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을 나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앞에서 소개한 누스바움의 주장인 ‘가장 무력한 존재일수록 자기의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한다’를 고려한다면, 이토록 다른 이의 생각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현대의 우리들이 극도의 불안과 무력함에 빠져있다는 증거는 아닐까?
선입견과 관성
조금 다른 결의 불편한 질문을 떠올려 본다.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상대를 나의 자에 맞춰 재단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우리가 비난하는 대상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단지 온라인에 떠도는 정보로만 판단할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정 짓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상대를 잘 안다는 편향에 빠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대상을 내가 비난하기 좋은 상태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대부분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즉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대상을 판단한다.
진보다, 보수다. 무식하고, 극단적이고, 위선적이고 등등.
이렇게 특징을 지어서 구분하면 쉬워진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이렇게 관성적으로 규정하는 행위가 그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일까? 이처럼 상대를 내가 갖고 있는 선입견에 맞춰 특정 개념이나 이미지로 치환한다면 그건 단지 상대를 내가 가진 이해의 범위 내에 집어넣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재단하기 이전에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필요가 있다.
“내가 저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저 사람의 모든 걸 말해줄까?”
불안을 견디는 성숙함
왜 우리는 타인을 통제하지 못해 안달하는가? 답은 아마도 타인에게도 나에게도 없을 것이다. 현대는 개인이 무엇인가를 통제할 능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해진 사회, 흔히 파편화된 사회라고 일컫는 현대 사회의 특징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작고 사소한 것을 찾는다. 누군가의 일탈, 잘못 내뱉은 한마디 말 같은 사소한 실수를 선입견으로 관성적으로 통제하려고 한다. 그렇게 통제하려는 행동이 결국은 평범한 누군가를 악인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누군가를 적으로, 원수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디지털 환경은 이런 일들이 너무 쉽게 벌어질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살만한 사회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숙한 사회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타인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디는 사회, 내가 옳다고 믿으면서도 내가 틀릴 가능성을 남겨둘 수 있는 여유로움이 존재하는 사회,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존재 자체는 인정할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라면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뜻을 합쳐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되지 않을까?
당연히 누군가를 비판할 수 있고, 행동에 책임을 물을 수 있고, 토론에서 상대와 생각이 다름을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일 것이다.
내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상대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팽팽한 대결은 우리 모두를 지치게 하고, 사회 전체가 피로감에 물들면 불안이 증폭하게 될 것이고 결국 내 두려움 때문에 다시 상대를 공격하게 되는 악순환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계를 나만의 세계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면 결국 우리가 발견하게 될 진실은 그 세계는 아무도 없이 나만 존재하는 분절된 공간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