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소통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저자의 죽음” 이후, 예술 작품들은 해체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이건 어쩌면 예술 작품을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여기지 않는, 권위적이며 과거지향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오늘날 많은 독자 또는 감상자들은 예술 작품 앞에서 두 개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작품을 해체하라, 작가는 이미 죽었다”라는 바르트식의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전통적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두 목소리 외에 우리가 놓친 제3의 목소리는 없는 것일까요? 만약 작품이 살아 숨쉬는 생생한 목소리라면, 작품과 소통하려 하지 않고 ‘고정된 텍스트’로 전제하고 해부하려는 시도나 작품이 탄생한 시대와 장소로 돌아가자는 생각은 이미 전제부터가 틀린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예술은 소통일 수도 있다는 점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실험실의 개구리: 예술의 대상화가 불러온 문제들
포스트 구조주의는 작품을 ‘변하지 않는 고정된 텍스트’로 전제하고, 그 안의 기호들을 해체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것을 지적 덕목으로 삼는 듯 보입니다. 텍스트를 “인용들이 엮인 직물”로 보고 작가를 단순한 ‘필사자’로 격하시킨 이러한 주장은 일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해부를 끝낸 개구리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예술 작품을 단지 해체의 ‘대상(object)’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많은 걸 놓치고 말 것입니다. 왜냐면 진정한 예술 작품들은 소통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소리를 듣는 것은 오직 작품이 살아있을 때만 가능한 행위입니다. 작품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경험을 느끼기 위해서는, 각 작품이 부분으로 해체되기 전, 즉 전체로서 창작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어야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텍스트를 변하지 않는 고정된 대상으로 규정하는 논리가 어쩌면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할 “가장 과거지향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소설을, 어떤 교향곡을 또는 어떤 미술 작품을 10대에, 20대에 그리고 더 나이가 들어서 다시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그 해당 작품이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의 외형은 고정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 텍스트와 내가 상호 작용하는 동안 생겨나는 사유, 감정, 그리고 관점은 매번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의도’를 찾기 전에: 작품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당연히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주장 역시 온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의도를 읽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작품을 정답이 있는 고정된 질문으로 박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도를 추적하는 것이 해체를 비판하면서 또 다른 권위를 세우는 일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독자(감상자)에게 필요한 태도는 작품의 진실한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비평가가 되지 말고, 소통을 위해 귀를 열고 조용히 작품 곁으로 다가가는 것, 작가가 들려주고, 보여주고, 읽어주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눈과 손이 되어 같이 느껴보는 것. 이렇게 온전히 작품의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야말로, 나보다 먼저 무엇인가를 발견한 타인(창작자)에 대한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일 것입니다.
조지아 오키프의 거대한 꽃 그림을 예로 들어볼까요? 작가의 꽃 그림 속 이미지를 성적인 기호로 해석하는 비평가들도 꽤 많지만, 아무런 선입견 없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일상에서 꽃을 볼 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작가 역시 자기 작품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Nobody sees a flower really; it is so small. We haven’t time, and to see takes time.” — 아무도 꽃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꽃은 너무 작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고,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작가는 어쩌면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꽃의 핵심에 관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작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해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당신이 스치고 지나간 이 경이로운 것을, 함께 천천히 들여다보지 않겠어요?”라는 말을 건넨 것입니다. 이렇듯 작가가 작품을 통해 소통하려는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이것은 특정 기호다”라고 단정하며 해체하려는 태도는, 살아서 움직이는 무엇인가를 도살장의 고깃덩어리처럼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열린 공간을 향한 가능성: ‘제3의 작품’과 성장
만일 작품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살아있는 것은 만남을 통해 서로를 변화시키고 함께 성장합니다.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 말하듯, 모든 존재는 홀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습니다. 예술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은 감상자를 만나기 전까지 온전히 살아있다고 말하기 어렵고, 감상자는 작품을 만나기 전까지 그 안에 잠든 새로운 자신을 깨우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생각과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듣는 순간, 우리는 작품 속에 우리가 들어가 담길 수 있는 공간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경험과 생각이 특정 작품을 만나며, 함께 조응하는 순간과 공간을 찾아내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예술 작품 감상과 해석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창작자도 감상자도 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제3의 작품’인 ‘성장’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이 성장은 감상자가 작품의 의미를 좀 더 새롭고 풍요롭게 느끼게 만드는 선순환을 가져올 것입니다. 즉, 창작물은 감상자와 만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되는 ‘역동적인 소통’의 도구입니다. 조심스럽게 작품으로 다가가며 시작된 이 소통의 결론은 물론 전적으로 감상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계적으로 작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갈 수도 있고, 작품을 통해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장이 많아 질수록 우리는 작품을 더욱 더 깊이있게 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르트가 주장한 ‘해체’는 어떤 필요가 있을까요? ‘해체’는 이런 소통의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꺼내 쓸 수 있는 긴요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낡은 관습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텍스트가 암시하는 기호적 의미를 분석하는 일이 소통을 도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해체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소통의 한 방식, 즉 수단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보기도 전에 어딘가를 뜯어내려고 칼을 꺼내는 것과, 충분히 시간을 들여 살핀 후에 필요하면 그에 맞는 도구를 활용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감상법: ‘함께 성장하기’
이처럼 진정한 감상법은 작품을 정답이 숨어있는 보물 상자로도, 무조건 해체해야 할 무의미한 기호 덩어리만으로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예술을 하나의 대상이 아닌, 나를 위해 나와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로 여기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 말해보며 그 과정에서 함께 울리는 새로운 공명 속에서 나만의 관점과 세계를 찾아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예술 작품 감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성장이 아닐까요?
모든 일이 그렇듯, 예술 감상에서도 중요한 것은 확정된 답이 존재한다는 선입견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닌 정해지지 않은 무엇인가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예술을 고정된 텍스트로 보고 해체하는 과거의 논리를 넘어, 예술과 내가 만나 어떤 새로운 존재로 성장해 나아갈지를 고민하는 함께 소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의 시작은 어떠한 권위도 또는 반대로 그 권위의 해체도 아닌, 조심스럽게 소통하고자 하는 감상자의 이해와 용기일 것입니다.
끝내며
우리는 그동안 예술 작품을 단순히 ‘공략해야 할 대상’으로, 혹은 ‘해독해야 할 암호’로만 여겨온 것은 아닐까요? 작가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난 뒤, 여러분의 내면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지 느껴보세요. 여러분은 작품이 가리킨 방향 너머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무언가를 발견하셨나요?
이번 에디토리얼은 ‘해석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을까’를 다투기보다, 예술이 살아있는 존재라면 우리의 감상법 역시 살아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체라는 차가운 논리보다 예술은 소통이라는 따뜻한 마음이 우리를 더 멀리 더 깊게 이끌어 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폴리뷰온라인은 독자 여러분의 열린 마음이 새로운 대화의 시작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