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셜 미디어를 보다 보면 귀여움을 강요하는 포스팅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반려동물이나 아직 말도 못하는 어린 아기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며, 그로 인해 아기나 동물들이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에 담아 올리는 피드들입니다.
예컨대 아기가 아끼는 장난감을 빼앗아서 울음을 터뜨리게 해놓고 그 모습을 귀엽다고 웃거나, 반려동물에게 간식을 줄 듯 말 듯 애를 태우다가 그들이 화를 내는 모습을 포착하는 식입니다. 이런 포스팅들은 꽤나 인기가 좋아서 “심장저격”, “너무 우습고 사랑스럽다” 같은 댓글들이 포스팅 아래에 가득 차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찝찝해지지 않나요? 그런 감정이 든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타자의 ‘곤란함’을 귀엽다는 말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귀엽다’는 정확하게 어떤 감정일까요? 순진한 대상을 향한 우리의 순수한 애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반려동물의 굳어버린 눈동자를 보며, 아이의 울음을 보며 ‘귀엽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어쩌면 우리가 그들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귀여움’이라는 단어는 많은 경우 통제하는 자(권력을 쥔)가 자신보다 힘이 약하다고 느껴지는 대상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악의 없는 장난이고 심각한 학대도 아니니, 그저 웃고 넘길 에피소드일 뿐일까요? 문득 뒤틀린 상상력이 만들어 낼 법한 기묘한 상황이 떠오릅니다.
역지사지: 권력이 당신의 ‘당황’을 유도한다면
엄청난 자산가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 당신을 최고급 레스토랑에 초대했다고 가정해 보죠. 그들은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평소에 먹기 힘든 무척 귀하고 비싼 메뉴를 주문합니다. 당신을 대접하기 위해 주문했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만약 그들이, 막상 주문한 메뉴가 나오자, 당신에게 음식을 먹고 싶다면 테이블에서가 아닌, 테이블 아래의 플로어에 엎드려서 먹어야 한다고 한다면? 물론 당신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다며, 당신의 당황하는 모습에 그들은 “악의는 없다”고 그저 “장난일 뿐이었다고” 손을 내밀며 화해의 표시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그들의 시선속에는 상대가 그런 짓궃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가득차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아기나 반려견에게 짓궂은 장난을 칠 때처럼요.
혹은 이런 장면은 어떤가요? 서로 악수로 화해를 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초대한 그 권력자가 따라오더니 화장실 문을 가로 막으며 생글생글 웃습니다. 당신은 급해서 안절부절인데 그들은 당신의 당황하는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와! 이 장면 올리면 뷰 수가 엄청나겠는데” 라며 킬킬거리고 있습니다.
만약 실제로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요? 틀림없이 엄청난 모욕감, 당혹감, 무력감등이 밀려오고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들 것입니다.
음식을 바닥에 놓거나 화장실을 잠시 막는 행위 자체가 육체적으로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심각한 폭력’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권력에 억압당하는 상대적 좌절감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자들은 타인이 곤란함을 느끼는 것에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권력이 만들어 내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단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타자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반려동물과 어린아이를 놀리는 행위의 기저에도 어쩌면 우리를 통제하려는 권력의 부당함과 동일한 동기가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부당함을 ‘귀엽다’는 언어로 포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감각하게 반복되는 주장.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 몰랐어요”
이처럼 권력의 비윤리적 태도와 타자를 대상화하여 유희의 도구로 삼으려는 경향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치스러운 단면인 학교 폭력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잔혹성을 드러냅니다.
많은 학교 폭력 가해자들의 답변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냥 장난이었어요. 상대가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 정말 몰랐어요.” 피해 학생이 당황하고, 겁에 질리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하나의 유희처럼 소비해 놓고서, 정작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공감이 결여된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 등에도 날카롭게 그려집니다. 소년 가해자의 잔인함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에서 살인을 저지르고도 막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단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해서 혼란에 빠진듯 그려지는 소년의 모습은 피해자가 자신과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 아닌, 나와 내가 속한 무리의 욕망과 유희를 위해 언제든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렇게 싫어하는지 몰랐다”는 말은 결국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본 적 없다”는 고백일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밝힌 ‘악의 평범성’
독일 출신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나치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뒤,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을 자행한 흔히 악마처럼 여겨졌던 사람들이 실은 엄청난 괴물이 아니라, 그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는 책의 내용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폭력 등 현재 벌어지는 많은 사건 사고를 되돌아보면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 점점 더 동의하게 됩니다.
아렌트는 악인들이 그토록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을 다름아닌 ‘사유의 부재’에서 찾았습니다. 여기서 사유의 부재란, 스스로 판단 능력을 잃어버린 채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고능력의 무능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상대가 어떤 기분일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무감각함이 결국 평범한 사람을 극단적 악행을 실행하는 범죄자로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싫어하는지 몰랐다”는 학폭 가해자의 변명과 “나는 시키는 대로만 했다”던 아이히만의 주장은 정확히 그 근원에 같은 뿌리를 공유합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고 능력의 부재, 즉 무능 그 자체인 것입니다.
‘공감’과 ‘시적 상상력’
그렇다면 인류는 이 평범한 그렇지만 거대한 악의 심연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까요?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공감(Empathy)’과 ‘시적 상상력’을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누스바움이 말하는 공감은 단순히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이 아닙니다. 누스바움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타자)의 위치에 서서, 타인의 고통과 곤란함을 나의 것처럼 상상해낼 수 있는 고도의 지적·감정적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기분을 온전하게 느끼고, 상상하는, 즉 공감할 수 있다면, 결코 누군가를 자신의 즐거움과 지위 확인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공감의 부재는 타자의 존엄성을 마비시키는 첫 단계입니다. 사소한 장난이 학교 폭력이라는 극단적 악으로 진화할 수 있는 것도, 귀여운 반응을 포착한 영상이 어느 순간 누군가의 실제 고통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단계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의 질문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고능력의 무능함을 없애기 위한 인문학적 사유의 출발은 거창한 윤리 법칙을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당해서 싫은 행동은 상대에게도 행하지 않는 역지사지, 그리고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다른 이들의 기분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반려동물의 굳은 얼굴과 어린아기의 울음은 ‘귀여운 리액션’이 아니라 실제로 불안을 느끼는 징후입니다. 아직 자신을 억누르는 권력에 저항할 충분한 대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감정적 상실을 덜 느끼지 않습니다. 상상 속에서 내가 권력 앞에서 느꼈을 그 모욕적인 당혹감을, 나의 권력 안에 놓여있는 아기나 작은 동물 역시 동일하게 느낄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포스팅을 보며 의미없이 웃기 전에, “지금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드는 부당한 권력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은 아닐지”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