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를 “괜찮다”로 읽는 사회

손바닥을 내밀며 "싫다"를 암시
AI가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최근 한 성폭력 사건의 판결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피해자가 무려 75차례나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법원은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이 판결은 지난 3월 그대로 확정되었고, 현재 여성 및 인권 단체들이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을 청구해 본안 심사가 진행 중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동의강간죄’ 입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물리적 위협이 없었더라도, 상대의 동의 없는 행위는 처벌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정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상대의 “싫다”는 명확한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는 행태가 우리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권위주의’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부재’이다. 결국 이런 점들이 심각한 문제라는 사회적 공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비동의강간죄’ 입법이 되더라도 성폭력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무심코 던진 돌이 만든 상처

이런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보자. 당신은 어렵게 입사한 어느 회사 또는 기관의 평사원이다. 어느 날, 당신이 속한 조직의 상급자가 명백하게 부당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규정에 어긋나는 업무 지시 또는 사적인 지시를 내렸다. 오랜 고민 끝에 간신히 용기를 내서 “이번 지시는 제가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상사는 당신의 거절 의사에 크게 개의치 않고, “다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데, 젊어서 튀는 거야”라며, “이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들 했던 것처럼, 당신도 그냥 하라는 대로 해.”라고 재차 강권한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이라던 상사의 말이 맴돈다.

자, 이제 당신 또는 당신의 동생이나, 자녀가 이런 상황에 놓인다고 가정하고 생각해 보자.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은 어떤 심정일까? 피해자의 상황에 대한 심리 실험을 한 느낌이 어떤가? 피해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젠 당신이 상급자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피해자의 상황에 공감이 되는 지금도, 만약 당신이 상급자라면 하급자에게 뭔가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할 것인가? 그 하급자가 정중하게 거절하는 문제에 대해 역시 강압적으로 지시를 따르게 할 것인가?

설사 위의 경우처럼 특수한 위계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이번엔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 보자.

당신은 백화점에 쇼핑을 간 고객이다. 그런데 주차 요원의 실수로 나보다 늦게 들어온 다른 차가 나보다 먼저 주차를 마치고 매장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발견한다. 왠지 가만히 있다가는 나만 무시당하고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쩌면 내 몫을 챙겨야 한다는 다급함에, 흥분해서 주차 요원을 향해 화를 내며 책임자를 데려오라고 고함을 질렀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번에는 당신이 그 맞은편에 서 있는 주차 요원의 입장이라고 상상해 보자.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로 약 몇십 초의 손해를 본 누군가가 당신을 향해 삿대질하고 있다, “이따위 일도 똑바로 못해! 책임자 데리고 와”라며 고함도 친다. 그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위해 대기하는 수많은 차에서 날 깔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오는 것 같다. 누군가의 불안과 이기심 때문에 당신의 인격은 순식간에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한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뭔가 대꾸하고 싶지만, 최저시급을 받는 처지라는 사실 때문에 유니폼 속의 당신은 대답할 권리조차 행사하지 못한 채 땀만 흘리며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설사 주먹이 날아오지 않았다고,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자신의 손해에 대한 정신적 피해보상을 받고 싶다는 명분 아래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평범한 개인들의 행동 앞에 서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한 번 더 나아가, 혹시 나 자신은 일상에서 내 억울함을 구제하겠다는 핑계로 누군가를 향해 이처럼 무례한 가해자가 된 적은 없었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생각하는 능력의 중요성

직장 내 위계를 악용한 강요든, 백화점에서 벌어지는 고객의 과도한 요구든,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성폭력 사건이든 그 안에 담긴 문제의 본질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타인의 의사를 무시해도 된다는 오만함과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무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21세기 가장 발전한 국가로 꼽히는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을까?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일찍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와, 이후 미완성으로 남은 『정신의 삶』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 바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내 행동의 결과를 타인의 입장으로 고려할 줄 모르는 무능력, 즉 ‘사유의 불능’에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예시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가해 행위는 대부분 괴물 같은 악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문제는 그 가해자들이 자기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상처와 절망을 안겨줄지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혹은 피해자의 감정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유의 불능’ 상태에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역시 다음과 같은 통찰을 보여준다. 그녀는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타인의 취약성에 깊이 연대하는 ‘공감(Compassion)’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각자가 약자의 위치에 서서, 그 강압적인 상황이나 무례한 폭언 앞에서 느끼게 될 두려움과 고통의 감정을 온전하게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그 사회는 ‘정의’의 출발점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꾼다면

우리는 누구나 권력의 사다리 맨 아래에 놓일 수 있고, 유니폼을 입은 서비스 직원이 될 수 있으며, 주저주저하며 어렵게 내놓은 나의 “싫다”가 거센 파도에 떠밀려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허무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법정에서 75번의 “그만해”를 외면한 논리와, 회의실에서 정중한 거절을 짓밟는 논리, 그리고 주차장에서 누군가의 존엄을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는 논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싫다”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위치나 계급을 무기로 내 주장을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그런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심각한 ‘폭력’에 해당한다는 점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식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나의 언행이 혹시 누군가의 삶에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모두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상상력과 그들의 상처에 수반되는 감정의 실체를 이해하고 깊이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타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짓밟는 낡은 권위주의적 사고를 끝내야만 할 것이다. ‘동의’를 묻는 것, 그리고 상대의 명확한 의사를 이해하는 행위는 단순히 특정 법을 제정하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시스템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모두가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회적 공감,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충실히 실행하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히 요구된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