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의 확신을 스스로 ‘생각’하는 행위로 증명하고자 했던 철학자 데카르트의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굳이 몇백 년이 지난 데카르트의 명제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매일 수많은 생각에 휩싸여 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하루 내 안에서 융기한 것들이 정말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일까요? 혹시, 알고리즘이 추천한 영상을 보며, 영상 속 주장이 마치 내 생각인 양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것은 아닌가요?
‘생각’이 흘러넘치는 사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엔 생각을 지시하는 어휘가 풍성하다 못해 흘러넘칩니다. 생각하고 궁리한다는 사고(思考),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진다는 사색(思索), 여러 가지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함이라는 사려(思慮), 자기 마음을 반성하고 살핀다는 성찰(省察), 곰곰이 잘 생각한다는 숙고(熟考), 그리고 요즘 들어 인기가 급상승 중인, 어디에나 두루두루 사용되는 ‘사유(思惟)’까지.
언어학이나 언어인류학 등에서 말하는 “어휘적 정교화(lexical elaboration)” 또는 “어휘적 분화(lexical differentiation)” 개념에 의하면 “어떤 문화가 특정 영역을 중요하게 다루거나 자주 경험하면, 그에 대해 더 많은 어휘적 구분이 발달한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이란 행위 또는 ’생각‘ 자체의 의미에 대해 그토록 세밀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말에 ’생각‘에 관한 단어가 이토록 많은 까닭이, 유독 지적인 듯 보이려는 한국인의 허영심 때문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유’의 시작
‘사유(思惟)’라는 단어는 사실 서양 철학이 아니라 고대불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고대 산스크리트어, ’cintana’는 대상을 구별하고 살피며 헤아리는 행위, 즉 탐욕이나 분노 같은 번뇌에서 멀어지기 위한 마음속으로 깊이 침잠하는 명상적 상태를 가리켰다고 합니다. 이를 중국에서 한자어 ‘思惟’라고 옮긴 것이 그 시초입니다, 이 본래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인 <반가사유상>입니다. 한쪽 다리를 다른 편 무릎 위에 올리고 같은 편 손을 올려서 손가락으로 턱을 아래 뺨에 살짝 댄 채 명상에 잠긴 모습은, 뭔가를 향해 ‘생각’ 근육을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아닌, 차분하게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름에 적힌 사유의 의미를 정확하게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쓰였던 ’사유‘는 외부를 향해 논리를 펼치는 서구적 사고방식과 달리 내면으로 침잠하는 명상적 개념이 강한 단어였습니다.
사유의 변용
그런데, 이 단어가 19세기 말 일본 메이지 시대를 거치며 전혀 색다른 모습을 갖게 됩니다. 일본의 계몽 학자 니시 아마네는 당시 서양 철학 체계를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에 앞장섰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7년 출간된 그의 저서 『철학계제(哲學階梯)』에서, 그는 독일어 Denken이나 라틴어 Cogitare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cogito ergo sum‘에 쓰인)에 대응하는 일본어 철학 용어로 ‘사유’를 선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정확히 어떠한 논의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 시기를 전후로 원래 명상적 관조를 뜻하던 ’사유‘라는 단어가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서양 철학적 ’사고 행위‘ 전반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형된 ’사유‘는 냉철한 숙고도 거치지 않고, 근대 한국 학계와 교과서에 흘러들며 오늘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번역이 생각을 가두는 순간
문제는 이 ’사유‘란 단어 하나가 서양 철학의 다양한 ‘생각’또는 ’생각 행위‘ 전체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어의 Denken, Gedenken, Bedenken, Besinnung, Uberlegung, 영어의 Think, Thoughts, Thinking, Reflection 등 의미와 용례가 미세하게 다른 단어들을 ’사유‘ 하나로 치환해버리면, 우리는 생각의, 그리고 철학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이런 ’사유‘ 대중화 현상은 철학서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한길사에서 출간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서론에 등장하는 reconsideration(재고–다시 살펴봄)을 ’사유‘로 옮기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think’와 ‘thinking’이란 표현 역시 책 전체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번역서는 이 단어들을 ‘사유’라는 단어 하나로 통일시키는 바람에 독자들은 저자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게 됩니다. 소설에서도 이런 예를 발견하게 되는데, ’열린책들‘에서 펴낸 소설 <모비딕>은75장 ’참고래의 머리 –비교 고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speculative(사변적)을 ’사유‘로 옮기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정밀하게 깎아 놓은 개념들이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사유’라는 만능열쇠 하나로 통일되면서, “한 번 내린 판단을 다시 들여다보는 행위”인 ’재고‘란 단어와 “확실한 근거 없이 추측하는 태도”인 ’사변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현재의 현상은, 요즘 논란이 일고 있는 문해력 문제가 단순히 어린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정교한 개념을 정교한 언어로 옮기지 못하는 번역이 쌓여나가다 보면, 사회 전체가 ’사고의 깊이‘에 관한 문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명품이 되어버린 단어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이렇게 한국어에는 ’생각‘을 가리키는 말이 많고, 또 하필 그중에서 유독 ’사유‘라는 단어 하나가 이처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 이유가 의미를 정교하게 구분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생각하다’는 평범한 것으로 ‘사유하다’는 고급스러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말이 갖는 고유의 의미(내면)가 아닌 이미지나 느낌(외형)을 바탕으로 특정 단어를 더 선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사고의 정밀함이 떨어지면 지적 허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생겨납니다. 마치 명품처럼 대중들의 선호도가 높아진 단어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외형을 빛나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사고는 점점 더 어두운 미로 속에 갇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생각‘은 어떤 것일까요? 또는 어떤 것이어야만 할까요? ‘여가’, ‘한가함’,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유시간’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스콜레(Scholè)‘가 현재의 스쿨(school)로 발전해 온 과정을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노동과 생산에서 벗어난 여유로운 상태에서 토론과 사색을 통해 ’생각(철학)‘을 발전시켜 왔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우리의 지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부산함이 ’생각‘ 또는 ’생각하기‘의 본질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다시 한번 묻게 됩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들
<폴리뷰온라인>에서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에 관해 생각해 볼 만한 질문들을 골라봤습니다. 물론 여기서 제시되지 않은 더 많은 질문이 존재할 것이며, 질문의 진정한 목적은 생각을 확장하기 위함이지 정답을 찾기 위함이 아닙니다. 스스로 던진 질문을 놓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오늘, 알고리즘이 보여준 타인의 생각을 ‘소비’하며 그것을 내 생각이라고 여긴 것은 아닌가요?
2. 어떤 단어나 문장을 보고 ‘깊다’고 느낀 순간, 그것이 정말 생각의 깊이였나요? 어쩌면 ‘복잡함’이나 ’난해함‘을 ‘깊다’고 착각한 것은 아닌가요?
3. SNS에 올라온 주장에 동의하기 전, 그 주장의 근거와 맥락을 직접 확인하나요?
4. 오늘 ‘사유’나 ‘성찰’ 같은 단어를 직접 사용했다면, 그 단어들 대신 ‘생각’이나 ‘고민’을 넣었을 때 의미가 달라진다고 생각했나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왜 더 어려운 말을 선택했을까요?
여러분만의 질문이 있다면 k.kibitz@polyview.online로 보내주세요. 폴리뷰온라인에서 다음 기사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