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난한 사람들은 보수 정당을 지지할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빈곤층의 진짜 목소리

계급과 투표
이미지는 AI로 생성되었습니다

“자기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데, 왜 보수 정당을 찍지?”

진보 진영에서 자주 던지는 이 질문,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래전인 2012년 한겨레 신문이 대대적으로 진행한 ‘가난한 민주주의’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결과는 흥미로웠습니다. 스스로를 경제적 ‘하층’이라고 답한 사람들 중 26.8%가 보수 성향이라고 답했는데, 이는 중층(19.1%)이나 상층(21.6%)보다 높은 수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유는 뭘까요? 당시 정영태 인하대 교수는 “자긍심을 느끼지 못하는 소외계층은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자아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또한 “연탄 한 장이라도 주는 쪽을 선호하게 돼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세대인가, 계급인가?

그런데 이 현상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전병유 한신대 교수와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2003~2012년 10년간의 유권자 성향을 분석한 결과, 한국의 저소득층이 ‘계급배반’ 투표를 하지 않았으며, 저소득층이 보수적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인 것은 실제로는 연령 변수와 결합된 효과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가난한 사람이 보수적인 게 아니라 노인이 보수적이고, 우연히 노인 중에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입니다. 연령 효과를 통제하면 저소득층의 계급 배반 투표 경향이 사라지며, 주관적 계층의식에 의해 저소득층은 오히려 계급투표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하지만 세대와 무관하게 노동계급이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현상은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관찰됩니다. 2024년 프랑스 총선 1차 투표에서 노동자의 57%가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을 지지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50%의 노동자가 극우 자유당(FPÖ)을 지지했습니다. 독일의 경우 브란덴부르크 주 선거에서 독일대안당(AfD)이 노동계급 표의 46%를 얻은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영국의 사례도 비슷합니다. 2019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전통적인 노동당의 아성이었던 ‘레드월(Red Wall-잉글랜드 중북부의 노동자 밀집 지역 )’을 무너뜨렸습니다. 브렉시트 이슈가 결정적이었는데,  옥스퍼드 대학의 제프 에반스 교수 연구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사이 불과 5년도 안 되는 기간에 영국의 계급 투표 구도가 완전히 뒤집혔다고 합니다. 2015년만 해도 중산층과 노동계급 사이의 투표 성향 차이가 18%포인트에 불과했는데, 2019년에는 보수당이 노동계급에서 21%포인트 앞서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2019년 노동계급 보수당 지지자 중 개혁당(Reform UK, 극우 정당)으로 이탈한 사람들의 64%가 이민을 가장 중요한 이슈로 꼽았다는 점입니다. 전체 인구에서 9%만이 이민을 최우선 과제로 본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복지 쇼비니즘’이라는 함정

여기서 우리는 ‘복지 쇼비니즘(welfare chauvinism)’이라는 개념을 주목해야 합니다. 1990년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극우 정당 연구에서 처음 제시된 이 개념은 “복지 혜택은 ‘우리’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은 복지국가 자체를 공격하는 대신, 복지의 계급 기반 연대를 무너뜨리는 전략을 취합니다. 이민자들이 복지 시스템을 무임승차한다고 주장하면서, 노동자들을 ‘기여하는 우리’와 ‘착취하는 그들’로 나누는 것이죠.

2023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서유럽과 남유럽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중산층보다 훨씬 더 복지 쇼비니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회민주당 지지자들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노동계급은 이민과 저임금 경쟁에 대한 우려, 그리고 자원 경쟁에 대한 인식 때문에 복지 쇼비니즘에 더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런 정당들이 실제로 집권하면 노동자의 권리를 축소하고 기존 보수 정당들과 연합해 반노동자 정책을 펼친다는 것입니다. 2023년 핀란드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사회주의 없는 노동자 정당”을 자처하는 극우 핀란드당이 집권 연합에 참여한 후, 작업장 내 노조 대표 역할 제한, 사회보장 삭감, 법원이 불법으로 규정한 파업에 벌금 부과, 정치적 파업 기간 제한 등 반노동자 법안들을 통과시켰습니다.

독일 행동경제학의 통찰

독일의 행동경제학자들이 모로코 시골의 극빈층 농가를 방문했을 때 일입니다. 그들은 당장 먹고살 돈도 부족한 집에 TV와 DVD가 놓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 곡식식 대신 TV를 샀지? 판단력이 없는 건가? 이래서 이들이 빈곤층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하지만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들은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너무 무거운 일상의 문제들에 사로잡혀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죠. 고대 그리스인이 힘든 일상을 잊기 위해 ‘비극’을 필요로 했다던 니체의 말이 떠오릅니다. 결국 장기적으로 패배감에 사로잡힌 빈곤층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단지 눈 앞의 부족함만을 채워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연구진은  “빈곤층의 삶을 편하게 해주라. 때로는 곡식보다 텔레비전을 주는 게 나을 수 있다.”이란 주장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최저임금 논쟁이 보여주는 간극

한국에서 한참 논란이 일었던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갈등을 떠올릴때마다  진보 진영은 답답해합니다. “왜 저소득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지?”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들려오는 저소득층의 목소리는 중산층 이상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진보 진영의 생각과 많이 다릅니다. 편의점 알바를 하는 20대는 “최저임금이 오르면 사장님이 사람을 줄일 텐데, 그게 나일 수도 있잖아요”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규모의 음식점에서 일하는 40대들이 “우리 사장님도 빚 갚느라 힘들어하시는데…”라고 말을 흐리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건 보수 언론의 세뇌일까요, 아니면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두려움일까요? 연구 결과들은 실제로 최저임금 인상 직후 단기적으로 일자리 감소가 관찰된다고 보고합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전체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일 당장 월세를 내야 하는 사람에게 진보 진영이 주장하는 ‘장기적 관점’이 얼마나 위안이 될까요?

노인 일자리 정책의 역설

좋은 의도로 시작된 정책이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노인 일자리 정책을 예로 들어볼까요. 빈곤층 노인들에게 일자리와 소득을 제공한다는 취지는 훌륭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폐지를 주워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노인들은 노인 일자리를 신청하러 갈 여유조차 없습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노인들이 그 일자리를 차지합니다. 게다가 ‘모두가 평등한’ 정책이라는 명분 하에 부촌에도 빈곤 지역만큼 노인 일자리가 배정되기도 하죠.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있을까요? 이런 역차별 현상을 중산층 이상에서는 감지하기 어렵습니다. 자신들이 당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빈곤층은 자신들을 핑계삼아 중산층 이상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복지 정책을 주장하는 진보 정당의 모습에 반감을 갖게 됩니다.

정당의 실패

한국의 2012년 대선 분석에서 나타났듯이, 하층의식을 가진 집단은 한때 사회경제적 정책 이슈에서 더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보 정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계층 또는 계급을 대표하며 이들을 위한 복지를 뚜렷한 정치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정당과 정치 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원인을 파악해보겠습니다.

과거와 달리 사회 분화가 심화되면서 노동자라는 타이틀이 특정한 집단을 의미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노동자 계층 내부로 들어가면 세분화된 다수의 집단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노동자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점차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렇다보니 전세계 대다수 진보정당들은 자신들에게 많은 관심과 의사를 표현하는,  즉 노동자이지만 중산층 이상의 여유를 갖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미래를 주시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나가게 됩니다.

이런 현실적 엇갈림이 빈곤층으로 하여금 진보 정당들이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우루과이의 좌파 언론인 모랄레스는 아르헨티나에서 재벌 2세가 가난한 이들의 표를 모아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논평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것은 자신의 영혼 안에 부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돈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생각이 부자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요? 혹시 중산층 이상의 진보 지식인들이 빈곤층의 정치 성향을 바라볼 때,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재 한국에서 진보 좌파라고 스스로를 정의내리는 많은 대기업 직원이나 전문직 종사자가 겪는 고민과, 이들이 우파를 지지하는 빈곤층이라고 깍아내리는 일용직 노동자나 영세 자영업자가 겪는 고민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 “장기적으로 사회가 더 평등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정책을 지지하지만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은 “당장 다음 달 월세를 어떻게 내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들 중에 과연 누가 잘못된 것일까요?

대화의 시작점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모든 정치 원칙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시간이 지나도 안정성을 유지하려면 정서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보기에 진보 진영이 감정의 영역을 부수 진영에게 내준 것은, ‘정서적 공감’의 부족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우리 자신의 일부로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는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실에 대한 연민, 불의에 대한 분노, 포용적 공감을 위해 시기심과 혐오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나단 하이트가 지적했듯이, “보수주의자가 진보주의자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를 이해하는 일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진보 정당들이 복지 쇼비니즘과 정체성 정치라는 극우의 무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이들이 노동계급의 실제 두려움과 경험을 충분히 경청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을 내 시각으로만 재단할 수 있을까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잘난’ 것도,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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