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가 다시 보기

김혜율 강산제 판소리 심청가 완창 공연 리뷰

무대에서 소리를 하는 판소리 가수
김혜율 강산제 심청가 완창 공연.

지난 2월 21일, 서초동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한 젊은 소리꾼의 뜨거운 호흡과 노련한 고수의 매끄러운 북장단이 교차하는 즐거운 예술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 한 소리꾼의 탄생

공연자가 직접 붙인 것으로 밝힌 이번 공연의 부제는 ‘줄탁동시’였습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미 닭이 밖에서 쪼고 병아리가 안에서 쪼며 서로 도와야 순조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소리꾼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의지를 그 한 단어에 담은 것이지요. 그 기개가 공연 내내 무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소리꾼 김혜율은 2026년 2월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할 예정인, 공연 당일에는 아직 대학생 신분이었던 어린 국악인입니다. 이번 무대가 생애 첫 완창 도전이라고 하며, 장장 5시간 가까이 걸리는 『심청가』를 두 분의 노련한 고수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쳤습니다.

물론 아직 소리가 완성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성악가의 몸을 악기로 비유한다면, 최소한 30대에 접어들어야 어느 정도 완성된 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느린 대목이나 낮은 음이 이어지는 대목에서 어려움을 드러냈고, 긴장으로 몇 부분의 가사를 잊어버리는 실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소리꾼이 5시간을 혼자서 버텨내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이롭고 대견했습니다. 처음으로 한 소리꾼의 탄생을 곁에서 지켜보게 된 관객으로서 느낀 뿌듯함은, 쉽게 말로 옮기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회를 맡은 김나영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의 말에 따르면, 완창을 준비하는 과정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5시간의 노래를 혼자 부르기 위해서는 머리로 가사를 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온몸의 근육들이 그 음과 리듬에 동화되어야만, 의식하지 않아도 다음 가사가, 다음 음정이, 다음 장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해지는 옛이야기들처럼 폭포 밑에서 목이 트일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전체 가사가 몸에 완전히 밸 때까지 홀로 벽을 보고 앉아 부르고 또 부르는 것 같은 지난한 과정을 20대 초반의 청년이 이겨내고 그 자리에 설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공연 내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범피중류(泛彼中流) — 왜 이 음악은 느리고 당당한가

『심청가』에서 가장 중요하고 동시에 가장 유명한 대목은 〈범피중류〉라 할 수 있습니다. 판소리 장단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로 이루어진 곡입니다. 진양조는 1장단이 24박으로 구성되어, 인간의 일상적 호흡보다 훨씬 길고 느리게 느껴지는 리듬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음색이 구슬픈 계면조가 아닌, 맑고 웅장한 우조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199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심청가) 보유자로 지정되셨던 고 성창순 명창이 이 대목을 부르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 보시면, 이 곡이 지닌 느리고 위풍당당한 면모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심청가

〈범피중류〉를 듣는 동안 문득 바그너 오페라의 여자 주인공들이 떠올랐습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젠타, 〈탄호이저〉의 엘리자베스, 〈반지〉 시리즈의 브륀힐데. 바그너는 남성의 실존적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에 의한 구원’이라는 중세적 여성관을 반복적으로 무대에서 구현해냅니다. 캐서린 클레망과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비평을 빌리자면, 이 여성들은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모순을 예술이라는 명분 아래 희생당하는 셈입니다. 바그너는 결국 불완전한 남성성의 회복이 남성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절대적 타자인 ‘순결한 여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스스로 고백해버린 셈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심청 역시 같은 맥락에 놓인 주인공은 아닐까요? 임금과 아버지를 향한 충성과 효를 통치 기반으로 삼았던 남성 우월적 구조가 갖는 불안정성을, 열다섯 살 순결한 소녀의 희생으로 봉합하려 한 것이 어쩌면 이 이야기의 본질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떠올리게 된, 〈심청가〉의 음악적 구조가 이 생각을 조용히 반전시켜 주었습니다. 느리고 당당한 <범피중류>가 음악 구조적으로 정당성을 내포한다면, 심청가를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수동적 희생이 아닌 능동적 선택

심청은 어쩌면 사회적 시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하는 기존의 수동적 구원자들과는 다른 인물이 아닐까요? 오히려 남성적 사회 질서인 ‘효(사회법)’와 ‘약속(계약)’을 주체적으로 해체하는 새로운 시대적 기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검푸른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열다섯 소녀의 노래가, 슬프고 연약한 계면조의 음악이 아니라 이토록 장엄하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 증거일 수 있습니다.

판소리를 연구한 여러 학자에 따르면, 진양조 장단은 서사의 진행이 순간적으로 멈추며 하나의 선언이 발표되는 시간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우조라는 선법은 비극을 승화시키고 숭고미를 형성하는 음계로 분석됩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놓고 보면, 〈범피중류〉는 단순히 슬픔의 감성을 담은 노래가 아니라 주체적 선언으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바다로 뛰어드는 그녀의 결정은 체념이 아니라, 낡은 세계의 질서를 스스로의 몸으로 해체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관객을 감상적으로 흔드는 계면조가 아니라, 느리고 당당한 진양조와 우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요?

심봉사 눈 뜨는 대목

이 관점에서 공연 후반부의 하이라이트인 ‘심봉사 눈 뜨는 장면’을 다시 보면 색다른 아이러니가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해피엔딩을 암시하듯 자진모리와 휘모리가 몰아치는 빠른 장단 속에서 심봉사가 마침내 눈을 뜹니다. 그런데 가사를 다시 살펴보면, 이 장면이 단순한 기적의 성취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몽운사 화주승이 공들인다 허더니마는 영험이 덜 허신가 / 아이고, 아버지 / 임당수 풍랑 중에 빠져 죽던 심청이가 살아서 여기 왔소 / 아버지 눈을 떠서 청이를 보옵소서”

심청의 이 말에 화답하듯 심봉사가 눈을 뜨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애초에 아버지의 언약으로 인해 요구되었던 희생의 조건, 즉 공양미 삼백 석은 이미 오래전에 치러졌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단순한 희생이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닙니다. 주체적으로 운명을 바꾸고자 도전한 심청에게 생긴 새로운 능력, 기존의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키는 힘이 결국 아버지의 눈을 열어낸 것입니다. 마치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서 브륀힐데가 스스로 불길에 뛰어들어 신들의 세계(구체제)를 멸망시켰듯, 심청의 투신 역시 아버지들로 대표되던 낡은 세계관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행위로 읽힐 수 있습니다.

눈을 뜬 아버지에게 그가 알던 이전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복종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는 사라지고, 자신의 삶을 되찾아준 딸에게 운명을 빚진 수평적 부녀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무리 — 텅 빈 객석 앞에서

국립국악원을 방문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본의 독도 망언이나 중국의 김치 종주국 논란이 뉴스에 오를 때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달구는 애국심도, 유명 클래식 연주자의 공연 예약이 시작되면 광클을 마다하지 않는 음악애호가들의 열정도, 서초동 “예술의 전당” 한쪽 끝에 초라하게 자리잡은 국립국악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음악과 우리 극을 실제로 관람하는 횟수가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면, 말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편치 않게 느껴집니다.

그날 풍류사랑방 무대 위에서 5시간을 홀로 버텨낸 스물 초반의 소리꾼은, 심청이 인당수를 향해 뛰어들던 그 선언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얼마나 적은 숫자의 관객이 앉아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우리가 소중하다고 말로 떠들고 있는 것들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우리의 태도를 조용히 되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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