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시대: 관중이 된 인류

불타는 도시 앞에서 환호하는 훌리건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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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하던 미국의 이란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21세기를 ¼ 이상 살아온 우리에게 서늘한 기시감을 안겨준다.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세상은 점점 더 연결되고 있다는데, 우리가 실제로 목격하는 현실은 우리가 믿고 있는 인류의 발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있는 모습이다. 채워지지 않는 미국의 야심, 멈추지 않는 중동의 유혈 사태, 지금의 넓이로도 부족해서 더 많은 영토를 탐내는 러시아, 세계의 패권을 꿈꾸는 중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여전히 거대한 전쟁터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 비극적인 풍경 앞에서 정작 우리가 찾아야하는 진실은 전선이 어떻게 형성되었을지가 아니라, 전선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이토록 타인의 분쟁에 매혹되는가?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동시에 비열한 시선을 숨긴 채 누군가의 패배와 굴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어 그동안 숨겨놓았던 관음증적 심리와 대면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믿어온 것들

인류는 오랫동안 전쟁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믿는다. 종교와 민족의 이름으로 지속된 충돌과 구체제를 뒤엎기 위한 혁명이 되풀이하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인간 이성에 기초한 칸트의 <영구평화론>등을 기반으로 유엔이라는 국제 기구를 만들고, 국가별 조약을 맺고, 인권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그 노력 덕분에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현재 우리 눈앞에 보여지는 국제 정세는 그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강대국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강제로 타국의 국경을 바꾸어 왔고, 그런 흐름속에서 크고 작은 패권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구라는 한정된 경계안에서 욕망의 대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 문화가 진보해왔다는 믿음, 평화, 자유, 인도주의 등등은 혹시 세련되게 편집된 ‘영화’의 장면처럼 우리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 개념이 아닐까?

현실속의 우리는 여전히 2,500년 전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멜로스 대화’에서 언급한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할 일을 겪을 뿐’이라는 비정한 힘의 논리에 갇혀 있을 뿐이다. 

이 냉정한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현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분노의 온도는 왜 다른가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싸움을 내려다보던 관중의 선택은 늘 감정에 기반을 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검투사에게는 규칙을 따르라고 고함을 치지만, 반대로 마음에 드는 검투사는 반칙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재의 우리들도 분쟁의 현장을 이런 ‘선택적 정의’에 기반해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 전세계는 빠르게 반응했다. 소셜미디어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넘쳐났고, 모금 캠페인이 이어졌으며, 각국 정부는 이례적인 속도로 지원을 결정했다. ‘국제법’, ‘주권’, ‘자유’라는 단어들이 공론장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미국의 이란 침공 앞에서는 어떤가. 소셜 미디어의 많은 목소리들이 지금은 당시와 다른 말을 한다. “전략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지역 안정을 위해 불가피했을 수 있다”, “이란 정부의 도발이 먼저였다”. 침략이라는 행위의 본질은 동일하지만, 그 행위의 주체가 어느 나라인가에 따라서 대중의 반응이 달라진 것이다.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이란 공격을 제국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언론이나 사람들은, 러시아나 중국의 무력 행동에 대해서는 종종 침묵하거나 ‘역사적 배경’을 들며 폭력을 합리화하려고 애쓴다. 

이것은 단순히 위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폭격 당한 도시를 보면서, 그 잔해 아래 있는 사람들보다 먼저 그 도시가 속한 나라의 이름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나라가 우리 편인지 아닌지에 따라 분노를 표출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진정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정치적 신념을 확인해줄 도구로 그 고통을 이용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를 매우 불편한 지점으로 몰아넣는다. 이란의 아이들이 겪을 공포와 고통이 우크라이나의 아이들이 겪을 무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각기 다른 저울에 올려놓은 채 판단한다. 폭발 소리에 몸을 웅크리는 두려움, 가족을 잃는 슬픔, 하루아침에 일상이 사라지는 감각. 그 무게는 어느 나라에 태어났느냐와 상관없이 동등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서로 다른 추를 이용해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취약성’에 대한 자각은 인류가 가진 도덕적 상상력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 모두가 오늘 느끼는 평안이 단지 우리가 ‘운 좋게’ 안전한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국경과 이념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전쟁이 콘텐츠가 된 시대

오늘날 전쟁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사일이 목표물을 타격하는 고화질 영상이 소셜미디어 피드 위에서 여행 사진이나 음식 사진 사이에 섞인 채 흘러간다. 드론이 촬영한 도시의 폐허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전황 분석이 마치 스포츠 중계의 경기 분석처럼 편집된다.

우리는 화면 너머의 폭발을 보며 공포와 흥분을 느끼지만, 어느 순간 관전자가 된다. 그곳에 내가 없다는 안도감을 바탕으로, 마치 경기를 보듯 평가하고 예측하고 댓글을 단다. 이 과정에서 전쟁의 참혹함은 희석되고, 승패의 논리와 자극적인 서사만이 남는다. 우리가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끝내 싸움 구경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갈등을 통해 손쉽게 정치적 우월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 반대편에 나를 세우는 것. 그것은 간편하고 명쾌하지만, 현실을 심각하게 단순화하며 우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단주의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이 단순화에는 대가가 따른다. 관중이 열광하면 할수록, 경기장의 선수들도 점점 더 흥분에 사로잡혀, 더욱 자극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우리 모두는 부서지기 쉬운 존재다

우리 모두는 언제든 다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있으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은 국적이나 이념과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조건이다.

전쟁터에서 울고 있는 아이, 삶의 터전을 잃은 노인, 심지어 총을 들고 전선에 나선 병사까지도 본질적으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인간이다. 우리가 오늘 누리는 일상의 평안이 단지 우리가 ‘운 좋게’ 안전한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국경과 이념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이것이 감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의 문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폭력을 정당화하는 언어에 쉽게 동조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 된다.


힘의 논리 너머

지구는 정해진 틀이다. 자원은 유한하고, 면적도 정해져 있다. 이 닫힌 조건 밑에서, 민족이나 국가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은 어느 정도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강대국들이 영향권을 두고 다투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패턴이기도 하다.

지난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 사실을 상기시킨다. 전쟁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과 폭력으로 마무리된 갈등은 언제나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의 잘못된 종전 처리가 2차 세계대전을 예비했고, 20세기 말 냉전의 종식이 곧바로 새로운 지역 분쟁들의 시대를 열게된 사실들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런 역사의 교훈 앞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남을 것인가’여야 한다. 이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다. 더 긴 시간을 보는 현실적인 태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미국이 이란을 침공하고, 러시아가 영토를 넓히고, 강대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이 거대한 장기판에서, 결국 희생되는 것은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국가나 민족이나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은, 그 어떤 명분을 붙이든 개인의 존엄을 짓밟는 일이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정치 지도자들의 주장에 무비판적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한 출발점이다.


관중석을 떠난다는 것

관중은 경기의 종료 여부에 상관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경기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던, 경기장 밖의 일상은 계속된다. 지리적으로 분쟁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는 것, 오늘의 일상이 폭격이 아니라 출퇴근과 식사와 소소한 즐거움으로 채워진다는 것. 이것은 태어난 곳을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아닌, 일종의 운이다. 이 운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겪은 전쟁의 상흔에 대한 우리의 발언이 얼마나 무의미할지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만약 당신이 지금 비난하고 있는 특정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당신은 그들을 현재의 관점으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만약 오늘 당신의 도시에 공습 사이렌이 울린다면, 당신은 이 전쟁을 지금과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겠는가. 이 상상은 불편하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바로 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광란으로 가득한 관중석을 떠난다는 것이 곧바로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소비하는 정보와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내가 형성하는 여론이, 이 시대의 폭력을 심화시키거나 혹은 조금이나마 완화하는 데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일 것이다.

공감을 언급하면 ‘감정에 치우치면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반론이 등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국제 정치는 이해관계를 논리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감정을 앞세우면 이성을 흐리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감은 더 많이 울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판단의 전제를 점검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정책이 그 정책의 수혜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내가 지지하는 선택이 그 선택의 결과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묻는 것. 이것은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책임 있는 판단을 위한 필요 조건에 가깝다.

오늘 아침 접한 분쟁 뉴스 아래 달린 수많은 댓글 중, 희생자의 고통을 진심으로 상상하며 쓴 글이 몇 개나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어쩌면 우리의 댓글이 또 다른 전선을 만들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나아갈 길

분쟁의 시대는 단순히 전쟁터의 포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분열된 여론, 선택적인 분노, 조작된 감정,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조용히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뉴스 하나하나에, 달리는 댓글 하나하나에, 대화 속에서 고르는 언어 하나하나에, 분쟁이 더 심화될 수도 혹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우리가 어떤 질문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고도의 도덕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단순히 평화주의자가 되라는 권고가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때, 우리는 언제든 콜로세움의 관중이 아니라, 운동장의 검투사 위치로 떨어질 수 있다.

우리의 정의는 얼마나 우연적인가? 우리의 분노는 얼마나 조작된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쯤 타인의 비극을 관전하는 습관을 버리고, 고통의 연대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 말로, 21세기에도 지속되는 야만을 멈추고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진보를 이뤄내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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