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교육의 현실 : 배움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무너진 학교, 고액 과외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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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수학 강사 한 명이 연간 300억 원을 번다. 대기업 20년차 직원들의 평균 연봉을 대략 일 억원 정도라고 한다면,  이런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 직원 약 300명의 연봉을 유명 강사 한 명이 벌어들이는 것이다. 실로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당히 많은 한국 고등학생들이 매년 수학 과목을 포기한다. 심지어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

역설적이지 않은가? 포기자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고등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강사의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 기묘한 생태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육도 돈으로 사는 시대

한국의 학부모들은 사교육비로 막대한 금액을 지출한다. 하지만 여러 연구는 사교육의 실제 학업 효과가 미미하거나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왜 부모들은 계속해서 돈을 쓰는가?

학부모들이 구매하고 있는 것은 교육 서비스가 아니라 단순히 ‘정서적 보험’인지도 모른다. 스타 강사의 강의를 등록하는 순간, 왠지 “최선을 다한 부모”라는 자기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설령 자녀의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부모 혼자서 자기위안을 할 수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하지만 이런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우리에겐 더 불편한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아이가 스스로 학습할 능력을 키우도록 돕는 대신, 유명한 강사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누가 학습의 주체가 되어야 할까, 강사인가, 아니면 아이인가?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다음처럼 수학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있다. 

“수학 교육이 학생들에게 중요한 개념을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교 중심의 문제 풀이 훈련으로 변질되었다”

 위대한 수학자가 수학교육의 문제를 지적한 지점에서 100여 년이나 지났지만, 한국의 수학교육은 여전히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문제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사고 있나?

스타 강사가 제공하는 것이 어쩌면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효능감’ 뿐이라는 의심이 들지는 않는가?

 ‘출제 경향 예측’, ‘특수 기법’, ‘숨겨진 비결’ 등 학생들로 하여금 스타강사의 수업을 듣고나면 자연스럽게 성적이 오를 것이라고 느끼게 하는 심리적 안정감 말이다.

이렇듯 지식으로 포장된 ‘심리적 안정감’이 언제부터인가 마치 일종의 독점적 정보처럼 여겨지며, 부모의 경제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진짜 학습, 즉 학생이 스스로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능력은 이 비싼 ‘심리’의 어느 구석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는 아이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누군가가 이미 생각해놓은 답을 구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포자는 개인의 능력 문제인가, 아니면 교육 시스템의 문제인가?

‘수포자’라는 용어 자체가 흥미롭다. 이는 마치 학생 개인의 선택이나 능력 부족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좋은 예는 아니지만 미국이나 영국 등으로 조기 유학을 간 학생들의 경우를 보면, 한국에서 수학 과목을 썩 잘하지 못했어도 현지 학생들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한국 학생들의 수학적 능력은 글로벌 기준으로 보면 평균보다 우수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수학을 포기하고 있다면 이는 단지 개인의 능력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수학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수학 과목 자체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수학을 선별 도구로, 계층 이동의 게이트키퍼로 사용하는 입시 제도가 그 원인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의 제도에선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배우는지, 왜 배우는지 고민해 볼 여유조차 없다.

수학을 포기하지 않은 학생들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처럼 단 한번의 마라톤 경기로  현대판 카스트 제도인 ‘명문대 입학’의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곳에서는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에서 “어느 대학을 졸업하셨어요?”라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계급을 확인하는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능력을 키울 시간과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

부모는 조력자인가, 대리 구매자인가?

여기 시나리오가 하나 있다. 자녀가 수학을 어려워한다. 부모는 두 가지 선택지를 마주한다.

A. 아이와 함께 앉아서, 어디서 막히는지 대화하고,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시간이 걸리고, 즉각적인 성적 향상은 없을 수 있다.

B. 연간 수십 수백억을 버는 유명한 스타 강사의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비용은 들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안도감을 즉시 얻는다.

한국 사회에서 A를 선택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아이가 실패할 시간을 허락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습이란 본질적으로 실패와 시행착오의 과정 아닌가? 스스로 틀리고, 왜 틀렸는지 깨닫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 없이, 어떻게 자기주도 학습 능력이 길러질 수 있는가?

우리는 아이에게 학습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학습을 대신 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중 심리와 명품화된 교육

주변에서 다들 스타 강사 강의를 듣는다. “너 어느 강사 수업 들어?”라는 질문에 우물쭈물하면 큰일난다. 명품 가방을 사듯, 맛집에 줄을 서듯, 학부모들은 스타 강사 대기줄에 이름을 올린다.

희소성과 상징. 모두가 가질 수 없고, 모두가 알아봐 주는 것. 이것이 명품의 본질이다. 그리고 교육이 명품화되는 순간, 우리가 사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미지다.

하지만 진짜 학습 능력—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구매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학생 자신이 시간을 들여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교육을 사는 건가, 이미지를 사는 건가?

공범은 누구인가?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건 누구인가? 탐욕스러운 강사? 무능한 교육 당국? 학벌 차별하는 기업?

아니면 우리 자신인가?

“내 아이만큼은”이라는 생각으로 학원비를 내는 부모들. “남들 다 하니까”라며 따라가는 학생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스스로 배우는 능력을 키울 시간을 주지 않고, 누군가가 대신 배워준 결과물을 구매하려는 우리 모두가 이 문제의 공범일 수 있다.

300억과 수포자가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

스타 강사가 고급 부동산과 미술품에 투자할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개인의 성공? 시장 경제의 당연한 결과?

아니면 이것: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능력을 키우는 대신, 부모들이 유명 강사에게 돈을 지불하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구조적 왜곡의 증거?

교육비로 쓴 돈이 부동산과 미술품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그것이 다시 자산 가치를 높이고, 그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마주할 부동산 시장은 더욱 진입하기 어려워진다.

이 순환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이건 아닌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무너진 공교육이 학생들에게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키워주지 못할 때, 사교육 시장은 번창한다. 학교에서 충분히 배울 수 없기에 학원이 필요하다. 학원에서도 어렵기에 더 비싼 강사를 찾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작 학생 자신의 학습 능력은 어떻게 되는가?

만약 우리가 정말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고, 학습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자 했다면, 이런 시장이 생겨났을까?

정답은 없다. 이건 단순히 사교육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교육을 바라보는 방식, 학습의 본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아이가 실패를 할 여유를 줄 수 있는 여유와 용기를 선택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 시스템 안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라는 점 말이다. 부모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것이다. 씁쓸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는 언제쯤 아이들에게, 배움 그 자체를 위한 시간을 줄 여유를 갖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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