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소통, 열린 작품: 말러와 셰익스피어를 돌아본다

무대 중앙의 악보와 원고
위 이미지는 canva로 생성되었습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 우리는 종종 고독한 천재를 떠올리게 된다. 어두컴컴한 방, 불안하게 흔들리는 약한 조명,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영감을 기다리며 고뇌하는 창작자. 그리고 마침내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작품. 그런데 작품이 탄생하면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예술사에 우뚝 솟은 두 거장, 구스타프 말러와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살펴보면, 이들에게 ‘완성’은 오히려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더 가까워 보인다.

새로운 시작

구스타프 말러는 작품을 완성하고, 초연이 끝난 후에도 좀처럼 악보에서 손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교향곡 1번은 1889년 초연 후에 오랜 기간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고, 교향곡 5번도 1904년 10월 쾰른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을 한 후, 관현악 편성을 여러 차례 손보아 가며 1911년까지 개정을 이어갔다. 주목할 점은 그가 작품을 고친 이유다. 말러는 최초의 완성본이 단순히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에서 울리던 소리와 공연장에서 실제로 울려 퍼진 음향 사이의 효과 차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말러에게 연주회장은 완성된 작품을 발표하는 공간인 동시에, 자신이 만들어 낸 소리(음악)의 실체를 확인하는 장소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작품을 대개 책이나 영상으로 접하지만, 당대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살과 피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적 예술이었다. 셰익스피어도 자신이 완성한 희곡을 무대에 올린 후, 실제 공연 현장에서 생각과 다른 부분들이 발견되면 과감하게 수정을 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햄릿』이나 『리어왕』 같은 작품은 현재 서로 다른 여러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리어왕』은 이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하는데, 1608년의 사절판(Quarto)과 1623년의 이절판(Folio, 이른바 ‘퍼스트 폴리오’)을 비교하면, 한쪽에만 있는 장면이 있고, 이른바 ‘환상의 재판’ 장면의 분량이 달라지며, 결말로 향하는 인물들의 비중에도 차이가 크다고 한다. (물론 이 차이의 원인은 여전히 많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 차이의 원인에 대해서, 오랫동안 필사나 인쇄 과정의 오류가 주된 이유로 꼽혔지만, 최근에는 셰익스피어 자신이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다시 손본 흔적이라는 개작설(revision theory)이 유력하게 대두된다. 이 학설이 맞는다면, 셰익스피어에게도 무대는 단지 완성한 대본을 선보이는 공간이 아니라, 배우의 목소리와 몸짓이 현실의 공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확인하고 작품을 재검토하는 곳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두 예술가가 활약했던 시대는 달랐지만, 이 두 명의 거장은 최소한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연을 작품의 종착점이 아니라, 작품을 검증하고 다시 다듬는 새로운 시작점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한 걸까

물론 말러와 셰익스피어가 작품을 고친 이유는, 단순히 ‘관객이 원하는 것을 구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된 모습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보이고 들려서’였다. 즉 이들의 수정 과정은 결국 냉정한 자기 검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완성된 작품을 다시 개작한 행위를 ‘대중과의 소통’으로 보는 관점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창작자가 자기 작품을 관객의 자리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스스로 타자가 되어, 창작한 작품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고 체험하겠다는 결심은 ‘소통’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쉽게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공연이나 연주회를 통해 대중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지속해서 고쳐야 완성된다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잦은 개작이 작품의 핵심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말러와 셰익스피어의 개작 사례를 예술인이 갖추어야 하는 필수 요소라고 하기보다, 이 두 명의 천재가 보여준 차별적인 천재성으로 여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도, 결국 자기 소리를 들어줄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함께 느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소통의 필요성을 스스로 그 ‘누군가’가 되어 실증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의지가 결국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이지 않을까?

혼자만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

이렇게 ‘혼자 마침표를 찍지 않는’ 태도는 예술가에게만 요구되는 태도가 아니다. 기업은 신제품 출시 전 잠재 사용자를 대상으로 베타 테스트를 하고, 강연자는 청중의 반응을 곱씹으며 다음 강연을 손보며, 이미 출시된 제품도 사용자 경험을 바탕으로 꾸준히 개선된다. 하나의 시선만으로 찍은 마침표에는 놓치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여러 방식으로 알고 있다.

물론 창작에서 예술가가 ‘스스로 관객이 되어 자기 작품을 되돌아보는 일’과, 일반적인 결정 프로세스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일’을 같게 여길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하나의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것 보다 문제가 많다는 점은 자명하다.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돌아보면,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과 정반대로 움직일 때가 많다. 정치나 사회적 이슈 앞에서 많은 사람은 자신의 관점만이 옳다고 믿으며, 타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기를 거부한다. 나의 생각이 맞을 수도 혹은 틀릴 수도 있지만, 좀처럼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이 오가는 토론보다, 내 의견과 타인의 의견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논쟁이 인기가 더 좋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독자들께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말러가 자기 곡을 다시 고치고, 셰익스피어가 자기 대본을 다시 손질할 때 그랬듯이,

오늘 우리는 다양한 소통을 통해 더 나은 마침표를 찍고자 하고 있는가?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