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오늘은 평등, 공정, 배려 등을 떠올리게 사건이나 사고는 없었나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는 퇴근길에 “오늘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힘들게 일했어. 저녁으로 뭔가 맛있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반대로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하는 그 누군가를 집에서 기다리는 다른 누군가는 “오늘도 정말 쉴 틈이 없네. 해도 해도 빨래는 쌓이고, 청소하고 돌아서면 다시 먼지가 날아다니고, 아침 먹은 그릇 설거지도 못 했는데 저녁 준비할 시간이라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누군가는 직장에서 회의에 시달리고, 거래처 사람을 만나고,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고, 다른 누군가는 집에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누구의 일이 더 힘들었을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종종 이 일들의 무게를 다르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밖에서 행해지는 일은 중요하고, 집안에서 하는 일인 ‘가사노동’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말입니다. 정말 이 두 일의 중요도가 다른 것일까요? 혹시 우리가 어떤 특정 활동만 ‘중요한 일’로 인정하도록 학습된 것은 아닐까요?
가사노동이란 ‘일’
누가 우리에게 “오늘 무슨 일을 했니?”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떠오르나요?
‘중요 거래처의 계약을 성사했어.’, ‘보고서 작성을 끝냈어.‘, ’새 프로젝트 기획했어.’와 같이 행위의 결과를 분명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상한 결과 또는 비슷한 사례를 얻게 되면 그 일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보고서를 제출하면 맡고 있던 업무가 끝나게 되고, 계약서에 서명하면 영업 활동이 끝나게 될 것이고, 제품을 완성하면 개발 프로젝트가 완성된 것이겠죠.
그런데 ‘집안’에서 벌어지는 가사노동은 이상하게 대부분 끝이 나질 않습니다. 아침에 청소하고 나도 저녁이면 쌓인 먼지를 발견하기 일쑤이며, 빨래를 한 후 옷장에 개어 넣고 나면 다시 빨래통 가득 쌓인 빨랫감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나면 어느새 또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됩니다. 설사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분이라도 “삼시 세끼”란 인기 방송 프로그램을 보셨다면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이렇듯 가사노동엔 쉴 틈이 없어 보입니다. 더구나 이렇게 끝이 없는 일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성과를 보여주기 어렵기까지 합니다.
한나 아렌트 ‘일’의 구분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아렌트가 정의한 ‘노동’은 인간의 생존과 삶을 유지하기 위한 반복적 활동입니다. 먹고, 소비하고, 또 먹고, 또다시 소비하게 되는 것처럼 계속 되풀이됩니다. ‘작업’은 인간이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적인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으로 간주합니다. 집을 짓거나 도구를 만들어서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일이 이 범주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행위’는 사람들과 함께 말하고 행동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고유함을 드러내는 활동입니다.
이 구분을 현재 우리의 삶으로 가져오면 흥미로운 생각거리가 생겨납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하는 일을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보고서를 남겼고, 내가 짠 코드가 남아있고, 내 성과가 숫자로 남아있기 때문이겠죠. 반면 가사 노동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반복되지만 아무런 결과가 남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노동’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어떤 관점으로 보면 직장에서 행해지는 작업조차 그저 반복되는 일상일 뿐입니다.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끝이 나지 않습니다.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계약 종료까지 계속 일이 반복될 것이며, 보고서 작성을 끝내면 또 다른 보고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받은 메일함에는 어제만큼이나 많은 이메일이 쌓여있습니다. 오늘 회의가 끝나고 나면 내일 또 다른 회의를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달의 매출은 이번 달의 매출일 뿐, 매달 새로운 매출 목표가 설정됩니다.
이렇게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당신이 타임 루프 영화 속 주인공이라서 오늘 만든 보고서는 내일 아침이면 하지 않았던 일이 되고, 오늘 보낸 이메일은 내일이 되면 한 번도 보낸 적 없는 내용이 된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들까요? 허무, 허탈, 무력감 등 아마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매일 쌓이는 이메일이나 매일 새롭게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 역시 타임 루프 영화처럼 그저 반복되는 일상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런 직장에서 활동과 가사 노동 사이에 특별히 다른 점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우리가 직장에서 한 일의 결과를 업무 ‘성과’라고 부르는 이유가 과연 그 일에서 진정 뭔가가 남겨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단지 그런 종류의 활동 결과를 사회적으로 ‘성과’라고 부르기 때문일까요?
가사노동은 왜 ‘완결’될 수 없을까
물론 가사 노동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무언가를 끝내는 일이 아니라, 특정 수준으로 어떤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어떤 상태를 유지하는 이 일의 특징은 완결을 어렵게 합니다.
예를 들어 깨끗하게 집을 짓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깨끗한 상태를 처음과 같이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한 번 요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매일 같이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빨래나 청소 같은 다른 집안일도 비슷합니다.
더군다나 이런 일을 잘한다고 특별히 어떤 결과나 보상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청소해 봐야 원래 상태를 유지하기 바쁘며, 한 끼를 열심히 준비해도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말조차 듣기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또 똑같은 반찬이야? 같은 투정이 날아오기 일쑤입니다.
이상하게도 가사노동은 노동 제공자의 돌봄을 받는 모두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즉 그저 평범한 하루를 보내야 잘하는 것일 텐데, 정작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 우리가 감사함을 느끼게 될까요? 결국 가사 노동의 중요함은 그 일을 담당하던 사람의 부재가 발생해야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냉장고가 비고, 빨래통에 빨래가 넘치고, 싱크대에 지저분한 식기가 쌓이고, 집 안에 먼지가 굴러다녀야 가사 노동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거죠.
호모 파베르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착안한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의 인간’ 개념을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노동이 아닌 작업을 하는 인간으로요. 즉, 먹고 자는 것과 같이 생존을 위해 매일 반복하는 ‘노동’과 달리, 호모 파베르는 자연 상태에 뭔가를 가해서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작업’을 행하는 개념인 거죠. 차, 집 등 우리가 보통 문명이라고 여기는 ‘인공 세계’를 구축하는 행위입니다. 이 작업으로 인해 우리는 시간의 순환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실 이런 종류의 인간상에 꽤 익숙합니다. 무언가를 잘 만들어 내고, 어떤 성과를 내고 하는 것을 유능하다고 인식합니다. 수치화로 환원하기 쉬운, 그래서 무엇이 더 높고 낮은지 비교할 수 있는 결과를 선호합니다. 이런 관점으로만 본다면 가사노동은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20년 동안 가족의 식사를 준비한 누군가의 노력을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가족의 평균 키나 몸무게가 옆집보다 더 크고 많이 나가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나요? 매일 집을 청소해서 가족이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또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요?
그렇지만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앞에서 생각해 본 것처럼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여러분의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매일 퇴근 후에, 방과 후에 직접 청소를 하고 내가 먹을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당연한 사실 앞에서도 이상하게 무언가 측정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에 가사 노동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시시포스의 식탁
매일 밥상을 차리는 것 같은 가사 노동을 종종 시시포스의 형벌에 비유합니다.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려도 다시 떨어지는 바위를 시시포스는 반복해서 밀어 올립니다. 가사 노동도 이와 비슷합니다. 청소해도 다시 더러워지고, 한 끼를 차리고 나면 또 새로운 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사 노동을 ‘끝없는 고생’으로 여기며, 굴러떨어진 바위를 끝없이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반복된다는 일의 특징이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까지 실패자로 봐야 할 이유가 될까요?
사실 현대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일상은 매일 식사 준비를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매일 출근을 해서,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업무를 단지 반복적으로 수행할 뿐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찰리 채플린이 그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통해 기계화, 부품화되어 가는 현대인의 삶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요? 아까 먹었으니까, 또는 어제 먹었으니까 더 이상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계속 끼니를 챙겨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도 반복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부조리하게 보이는 이런 반복적인 모습이 일상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가사 노동의 반복만을 아무런 결과가 생기지 않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주 잘 정돈된 집을 보면 무척 만족감을 느끼지 않나요? 정성껏 차려진 식탁을 마주할 때 행복해지지 않나요? 그렇다면 가사 노동은 결과가 생기지 않는 비효율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 결과를 평가할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일’의 기준을 물을 시간
처음에 언급한 두 사람에게 다시 돌아가 보죠. 한 명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 중이고, 한 명은 집안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들이 서로 자신이 맡은 부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누가 더 힘들었는지를 따지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육체적으로 누가 더 피곤한지, 정신적으로 누가 더 스트레스를 받는지 측정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누가 더 힘든지를 따지는 게 되면 안 될 것입니다. 왜 누군가의 행위는 ‘일’로, 경력으로 인정하고 다른 누군가의 행위는 단지 ‘가사노동’으로 비하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만약 남성이 가사까지 담당했어도 집안일의 중요도를 지금처럼 낮게 여겼을까요?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작업’ 활동이 유지되려면, ‘작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일상을 유지하는 노력인 ‘가사 노동’ 역시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가사 노동의 성과를 측정할 수 없다고 단지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삶의 질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지속할까가 아닐까요? 그렇게 하려면 무엇이 전제되어야 할까요? 다시 지저분해질 것을 알지만 매일 청소하는 것, 30분도 안 걸려서 모두 먹어 치워질 것을 알면서 매일 식사를 준비하는 일들이 누군가에 의해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누군가가 다른 이의 삶이 지속 가능해지도록 노력한다는 걸 안다면, 우리는 이런 노력에 적절한 평가를 하고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