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년 전, 적도의 어느 밀림 저편 동굴 속에 최초의 사람, 호모 사피엔스 무리가 모여 있습니다. 불이 붙은 나뭇가지로 암흑을 이겨낸 한 무리의 사람들은 동굴 벽 앞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손바닥을 벽에 댄 채 그 위로 붉은 황토를 잔뜩 붙여서, 누군가의 손자국을 남기려 한, 이 행위는 과연 무엇일까요?
도대체 왜 이 초기 현생 인류들은 차가운 동굴 벽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려 했던 것일까요? 사냥에서 잡고 싶은 동물들을 그린 것도 아닌, 손자국을 말이죠.
최근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의 한 동굴 벽에서 발견된 약 6만 7000여년 전의 손 이미지는, 이 질문에 대해 꽤 흥미로운 단서를 던져줍니다. 연구자들이 주목한 건, 이 이미지가 사냥에서 잡고 싶은 먹잇감 등을 그리던 주술적 행위나 집단 감정 표출과는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류의 먼 조상들은 이런 원시적 형태의 예술 행위를 통해 타인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뒤, 이번에는 유럽 대륙의 숲속에서 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흐느낌 같기도 한 이 소리를 만들어 낸 건, 고고학자들이 독일의 홀레 펠스(Hohle Fels)동굴에서 발굴해 낸, 대머리수리의 날개뼈를 깎아 만든 한 뼘 크기의 작은 피리였습니다. 단순한 소음이 아닌, 이 의도적으로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해서 만들어 낸 소리는, 인류의 조상들이 어떤 의도에서 건, 자신들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 낼 줄 알았다는 흔적인 것이죠.
동굴에 남긴 손바닥 자국과 숲을 가로질러 퍼져 나가던 뼈로 만든 피리의 소리.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인류 최초의 소통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언어처럼 기호나 문자가 아닌, 이미지와 소리로 현실의 경험이 담긴 서로의 삶을 나누던 방식.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예술’이라고 부르는 신비한 장르의 시작인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린 걸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인류는 이 풍요롭던 소통 방식을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대신 ‘언어’라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도구를 발명하게 되죠. 물론 언어는 놀라운 발명품입니다. 인류가 이룬 문명은 대부분 이 언어에 빚지고 있으니까요. 언어 덕분에 우리는 복잡한 생각을 빠르게 전달하고, 지식을 쌓고,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언어는 모든 것을 담아 낼 수 있을까요?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E.T.A. 호프만은 일찍이 이런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말이 끊기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된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역시 1896년경에 쓴 한 편지에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내 경험을 언어로 요약해 낼 수 있다면, 결코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 위대한 예술가들이 평생을 바쳐 예술 창작을 했던 이유가, 바로 언어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작곡가에게 음악의 본질은, 감히 언어로는 ‘요약’할 수 없는 삶의 본질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역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무엇인가를, 색과 모양을 통해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 말이죠.”
말러도, 오키프도, 호프만도.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 바로 그 자리를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어’라는 도구에 안주하는 순간, 최초의 인류가 가지고 있던 빛나는 소통의 수단들이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단어에서 우리 모두는 정말 같은 걸 떠올릴 수 있을까요?
언어학자 알프레드 코르지브스키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과연 이 짧은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실제 공간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 공간을 기호로 표시한 지도를 찾듯,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가 실제 땅의 모양이나 정감 등을 정확하게 담아낼 수 없듯, 언어 역시 현실의 풍부한 결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즉 알프레드 코르지브스키는 언어의 기호적 개념을 지도에, 그리고 공간이 갖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을 영토에 담아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사과”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머릿속엔 둥근 모양에 빨간 색상을 지닌 과일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단어에서 사과를 손에 쥐었을 때의 감촉,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터지는 새콤한 과즙, 가을 햇살 아래 과수원에 퍼지던 사과의 향기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절대 “사과”라는 두 글자 안에 포함될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그저 ‘사과’라는 언어적 형식의 기호로 치환된 어떤 개념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서로에게 옮길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실재(reality)도 상상(Imagination)도 아닌, 언어라는 특정 시스템이 만들어 낸 형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실제로 경험하고 느낀 많은 것들은 언어에 포함되지 못합니다. 형식적인 면에서 소통의 효율은 높아졌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고 더 깊이 소통하고자 했던, 사회적 인간이라는 본질은 점차 안개처럼 흩어졌습니다.
전 세계 교육 현장에서 예술과 문학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육에서까지 투자 대비 효율을 따지는 논리 앞에서, 예술과 문학은 늘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이죠. 하지만 현생 인류의 조상들부터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발전시켜 온 것이 예술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요? 오늘날 세계를 뒤덮은 정치적·사회적 양극화 역시,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주던 궁극의 소통 수단인 예술과 문학을 잃어버린 탓에 우리가 치르게 된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AI가 만들어 내는 언어
흥미로운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언어의 구조와 형식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LLM, 즉 거대 언어 모델인 AI가 바로 그 변화의 중심입니다.
AI는 수조 개의 텍스트를 학습한 후, 단어 간의 관계와 거리를 파악하고, 재계산해 내서 가장 자연스러운 단어들을 이어 붙인 결과를 제시합니다. 신경망 구조라는 첨단 기술을 통해 복잡한 문맥도 이해할 수 있게 된 AI는 이제 수많은 문장을 뉴스 기사, 책, 소셜미디어 포스팅 등의 형식으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이 유통되며, 또다시 AI의 학습에 데이터로 사용됩니다. 언어학자 소쉬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인이 만들어낸 말(파롤)들이 모여 언어의 규칙(랑그)을 형성하던 방식이, 이제는 확률을 통해 문장을 계산해 내는 기계들이 만들어 낸 말(파롤)에 의해 인간 사회의 규칙(랑그)들이 재정의 되게 된 셈이죠.
여기서 이런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말이 끊기는 곳에서 시작’되던 음악, 즉 언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던 그 감정과 경험들을 이제는 무엇으로 전달해야 할까요? 과연 확률로 무장한 AI의 언어가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 스스로 예술이라는 창조적 소통의 언어를 내려놓고, 기계가 만들어낸 재생의 언어 틀 안에 안주하기로 선택한다면, 인류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쩌면 우리는 말러가 그토록 음악으로 담아내려 했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경험의 영역에, 다시는 닿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소통
다시 동굴 벽의 붉은 손바닥과 독수리 뼈로 만든 피리 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붉은 손바닥 자국을 남긴 동굴 벽에 남겼던 그 석기 시대의 조상은, 독수리 뼈의 속을 파내서 떨리는 소리를 불어대던 인류의 조상들은, 대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실재와 상상 모두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만든 이 정교한 언어라는 구조 속에 우리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묶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요? 언어가 설정한 경계 안에서만 생각하고 대화하는 바람에, 오히려 소통은 점점 더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우리에겐 현실을 간략하게 축소해버린 지도 같은 협소해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더 장벽 너머에 실재하는 진실의 공간을 향해 나아갈 결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나누고 싶은 충동이 있다면, 당신 안에는 여전히 진정한 인간 본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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