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영화 <오디세이>가 전 세계 영화팬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대다수 영화 평론가 역시 이 영화에 대해 “오디세우스의 속죄와 반성은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메시지”라거나, “전쟁과 풍랑을 겪은 거친 영웅의 대서사를 가장 서정적이고 몽환적으로 다룬 영화” 등 “상처 입은 영웅의 귀향”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긴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남자, 그리고 끝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 이런 장면들은 미처 감동을 의식하기도 전에 우리의 눈물샘을 터뜨리게 만든다.
그런데 이토록 뛰어난 이 영화 앞에서 다음과 같은 불편한 질문이 떠오르는 건 필자 혼자만의 문제인가.
“왜 영웅(남성성)의 완성을 위해 여성의 희생이 필요한 것일까?”
사랑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
페넬로페의 정절과 기다림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그녀의 희생을 이토록 쉽게 영웅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증거로 치환해 버리는 것일까?
그리고 페넬로페의 기다림은 순수하게 그녀의 의지에 의한 것일까, 혹은 그녀가 처한 상황이 그녀에게 다른 선택권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닐까?
고대의 여성이 현대를 사는 여성들처럼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심지어 지금도 모든 여성에게 이런 자유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페넬로페는 일반인이 아닌 이타카 왕과 결혼한 왕국의 왕비가 아닌가? 그렇다면 구혼자 중 한 명을 남편으로 맞이하는 행위가 단순히 새로운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속한 왕국에 새로운 정치 체제를 탄생하게 만드는 문제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내 이전에 엄마이자 한 왕국의 수호자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그녀에게 어떤 선택의 자유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점도 생각해 보자. 새로운 남편 즉 새 왕이 등장하는 순간 그녀가 오디세우스와 사이에 낳은 아들, 텔레마코스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 볼 순 없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텔레마코스의 죽음을 예견하기가 그다지 어려운 판단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만약 여러분이 필자처럼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면 우리는 페넬로페가 버틴 20년이 아마도 당시 사회가 그녀에게 요구한 역할일지도 모르며, 단연코 자신의 자유의지에 기반한 결정(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우리는 영화를 보며 ‘정절과 기다림. 음! 그렇다면 영원한 사랑이군’ 하는 결론을 단순하게 내리고 있다.
이런 질문은 또 어떨까? 만약 페넬로페가 5년쯤 기다리다가 새로운 상대를 선택했다면 우리는 그녀를 ‘행실이 부정한 여자’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곗바늘을 <오뒤세이아>에서 조금만 앞으로 돌려서 <일리아드>를 살펴본다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나가 남편을 버리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떠난 모습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왜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를 향한 일편단심을 고수해야만 할까?
물론 추측과 달리(추측은 주로 틀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페넬로페가 진정으로 오디세우스를 사랑했기에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20년을 버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심지어 호메로스가 그려낸 오디세우스의 태도마저) 전적으로 그녀가 정절을 지키는가, 아닌가에만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여성의 생각과 자유의지는 어디로 간 채 우리는 오로지 그녀의 희생에만 집착하고 있을까?
사랑 혹은 또 다른 희생양
영화에서 페넬로페처럼 여성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호메로스의 원전과는 많이 다른 특징을 보유하고 등장한 칼립소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칼립소에 관한 해석을 변형했다고 밝혔다. 원전의 칼립소는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오디세우스를 붙잡아 두고 있는 여신이다. 7년이란 시간을 매일 밤 함께 사랑을 나누며 남자에게 불멸을 약속한다. 그런데도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풀어주어야 했던 것은 신들의 왕 제우스가 그렇게 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칼립소는 남성 신들의 삐뚤어진 성적 관념(남성 신들이 인간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관한 그들의 퍈파적이고 우월적 사고를 비난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갈 수 없었다. 제우스(남성)는 강하고 칼립소(여성)은 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은 이 서사를 뒤집어서, 칼립소가 욕정에 사로잡힌 무서운 여신이 아닌, 운명의 장난으로 자신의 섬에 떠밀려 온 남자를 정성껏 돌보고 치유하는 순수한 사랑을 드러낸 여성으로 만들어 버렸다. 왠지 근대적 서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남성(영웅)의 완성을 위해 순애보 같은 희생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리고 이 새로운 해석의 완성을 위해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까지 굳이 칼립소 장면에 편입시킨다. 그녀는 남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먹으면 기억을 잃는 열매를 사용하게 된다. 이런 신비주의적인 혹은 주술적인 모습은 늘상 여성 캐릭터에게 부여되는 특징이다. 스스로 선택한 사랑에서조차 주체적 의지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일까?
또 남성은 반드시 영웅이 되어야만 하나? 혹은 남성만이? 그리고 영웅이 되기 위해선 잃어버린 아픔과 고통의 기억이 필요할까?
이런 궁금함에 명확한 답을 찾기 쉽진 않겠지만, 최소한 대중은 영웅이라면 영화 속의 오디세우스처럼 이별의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며, 사랑하는 여인이 베풀고자 했던 불멸이라는 달콤한 선물도 뿌리칠 수 있어야 하고, 지워졌던 자신의 고통과 기억을 스스로 되찾으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놀란이 만들어 낸 칼립소는 영웅의 탄생을 위해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현재 기준으로는 매우 어색한 전근대적 여성성을 재현한 것은 아닐까? 바그너의 비극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인 젠타(방황하는 네덜란드인)와 엘리자베스(탄호이저)를 떠올려 보라. 2026년 놀란 감독이 만들어 낸 칼립소의 원형들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거의 2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처럼 전근대적 낭만주의가 사라진 지 오래인 지금에서조차 우리는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사랑했기에 결국 놓아 줄 것이다”라는 서사를 편애하고 있다. 여성의 사랑이 남성을 그의 영웅성을 완성하리라는 과거의 착각을 말이다.
이런 의문 속에서 또 다른 질문이 등장한다. 7년간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던, 다시 말해 주체적으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던 오디세우스의 귀향 결정은, 과연 20년이나 보지 못한 페넬로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한 번쯤 이런 가정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타카라는 공간은 강렬한 오디세우스의 통제 본능(가정을 하자면)을 편하게 분출할 수 있던 곳이었을 것이다. 트로이 전장에서는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기발한 아이디어(트로이 목마)로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아킬레우스의 용맹을 더 크게 외쳐댄다.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오디세우스에겐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추억이 남겨져 있다. 이타카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다시 이타카의 왕이 된다면 오디세우스는 기억 속 장면에서처럼 뭐든 자기 맘대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이타카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칭송할 것이다(속으론 아니더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그를 무서워하고 섬겨야 할 테니). 그런데 칼립소 섬에서는 뭐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영생을 얻더라도 이런 상태라면 그것이 오디세우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오디세우스의 마음이 위의 가정과 비슷했다면, 그가 귀향을 결정한 것은 단지 20년 전에 헤어진 여성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잃어버렸던 나의 권위와 능력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칼립소로 인해 자신이 상실한 통제 욕구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오디세우스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방법은 없지만, 그가 기억도 가물가물한 20년 전의 아내를 찾기 위해서 현재의 안락함을 그토록 쉽게 걷어찼을 것으로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란 의심이 든다.
오디세우스의 목적지
결국 오디세우스의 목표와 목적은 페넬로페가 아니라, 자신이 모든 걸 주도하던 시간과 공간을 되찾는 것이 아니었을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 『향수』에 우리가 되새겨볼 만한 통찰이 등장한다. 소설가는 향수(노스탤지어)가 반드시 특정 사람만을 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쿤데라는 오디세우스가 그리워했던 것은 어쩌면 한때 그가 누리던 부귀영화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잃어버린 권위와 권력을 되찾을 수 있는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디세우스가 되찾고자 한 것은 자신을 향한 페넬로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었던 이타카에 대한 권리, 즉 자신의 이름과 권위가 온전히 인정받던 과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칼립소와 보낸 7년의 세월에서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페넬로페를 향한 그리움이 아니라 상황을 자신이 주도하지 못하고 칼립소에 끌려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오디세우스의 본능적인 통제 욕구가 그의 귀향을 재촉한 것은 아닐까?
물론 3시간 남짓한 영화에서는 단순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녀(페넬로페)는 기다렸고 그(오디세우스)는 돌아와서 그의 앞에 서 있는 모든 적을 무찌르고 그녀를 구한다. 그렇게 완성된 서사에 우리는 열광한다. 하지만 그 열광의 뒷면엔 아직 묻지 못한 질문이 어둠 속에 묻혀있다.
같은 사랑, 다른 윤리
또 다른 궁금증 하나는 20세기 후반부터 오랜 시간 남녀평등을 중요한 사회적 합의로 여겨온 현대의 대중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이야기에 관해서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가이다. 비록 영화에서는 에피소드 하나로 흘러 가지만 원문에서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와도 함께 살았다. 한 여성과 7년 또 다른 여성과 1년 장장 8년이란 시간 동안 두 명의 여성을 거쳤음에도, 우리는 그의 행동엔 한 없이 너그럽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한 10년이 스스로 선택한 시간이 아니라 신들에 이끌려 겪은 운명의 시련일지라도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저지른 인간적 실수는 너무나 쉽게 잊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여정을 절대적으로 성장을 위한 방황이나 완성을 위한 고통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반대로 페넬로페가 정절을 지켜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 차이를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오히려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음을 암시하지는 않나?
오디세우스의 방황을 오디세우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 것으로 이해하고, 7년을 함께 보낸 여신을 떠나 집으로 귀향했으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면서, 20년을 홀로 견뎌야 했던 여성에게 무조건적인 정절과 기다림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언제까지 남성의 귀향은 감동이 되고, 여성의 기다림은 의무가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영웅의 탄생에 여성의 희생이 필요할까?
이것은 비단 영화 <오디세이>에만 관련된 질문은 아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도 수많은 영웅 서사들이 존재한다. 자수성가한 사업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정치인.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많은 영웅 서사 속에서 완성되는 위대한 귀환의 뒤편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의 희생이 깔려있다. 심지어 우리가 목격한 어떤 희생들은 그 내용에 상관없이 너무도 당연시 여겨지기도 한다. 이렇게 영웅 서사의 배경으로 밀려난 누군가는 영웅을 위해 기다리고, 영웅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접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그 희생을 사랑으로 쉽게 치환한다.
그렇기에 놀란의 <오디세이>를 본 후에 던져야 하는 질문은 영화가 얼마나 원전에 충실했는지, 또는 CG 없이 얼마나 완벽하게 원전을 재현했는지 또는 얼마나 큰 필름으로 만들었는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는 왜 21세기의 관객조차 전근대적인 서사, 즉 여성의 희생이 강요되는 이야기에 이처럼 감동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영화가 되살린 것은 오디세우스라는 영웅보다 더 오래된 박제된 신화인지도 모른다. 여성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며, 그 희생을 통해 완성된 사랑이 모험을 즐기는 남성을 영웅으로 탄생시켜야 한다는 신화 말이다. 이 신파적 신화에 눈물을 흘린다면, 한 번쯤 신화의 뒤편에 존재하는 희생자들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보길 바란다.
20년을 기다린 여성의 사랑만을 위대하다고 부른다면, 우리는 여성의 자기 선택권에 어떤 자리를 마련해준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