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영화를 보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장면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등장 인물에게 누군가가 분명하게 말합니다.
“혼자 가지 마”, “그 문을 절대 열지 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영화에서 절대 하지 말라는 대사가 그 등장 인물에겐 마치 꼭 하라는 말처럼 들리나 봅니다. 절대 하지 말라는 말에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는 인물이 젊고 매력적인 여성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녀들은 성적 매력이 넘치는 몸매를 강조하는 식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그런 그녀의 곳곳을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이런 부류의 인물들은 이상하리만큼 상황 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위험해 보이는 장소만 찾아다니며 보는 관객의 짜증을 유발합니다.
“왜 저기 들어가?”, “왜 말을 안 들어?”, “저러니까 죽지.“
그런데 혹시 이런 의문이 들지는 않나요? 왜 우리는 이런 부류의 등장 인물들에게 짜증을 내는 것일까요? 잠시 생각해 보면 더 불편한 질문도 생겨납니다. 그녀가 정말 멍청한 것일까요, 아니면 관객들에게 이런 특징을 지닌 여성 등장인물이 멍청하다고 느끼도록 연출된 것일까요?
‘파이널 걸’ 대 ‘현명한 남자’
물론 모든 영화가 이런 구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식이 너무나 뻔해져서 오히려 간혹 이 공식을 의도적으로 뒤집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슬래셔 무비(잔혹한 유혈극 장면이 많은 공포물) 들은 이런 틀에 박힌 구조를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한편에는 위험을 감지하는 사람이 등장시킵니다. 처한 상황을 의심하고, 던져진 미끼를 분석하고, 차분하게 기다리며, 조심스럽지만 막상 필요할 때 용감하게 행동에 나섭니다. 그와 반대로 다른 편에는 사회의 암묵적인 룰을 깨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듯 행동하며, 충동적이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려서 “하지 말라”는 말은 항상 반대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실수를 연발합니다.
이런 영화적 구조에서 누가 살아남고 누가 피해자가 되는지의 결정이 왜 중요한 것일까요? 영화가 특정한 행동만을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 다른 행동 양식은 짜증 나는 사람으로 규정짓기 때문이 아닐까요?
영화 속의 이런 구도를 처음으로 연구했던 캐롤 클로버는 1987년 이후 발표한 다수의 글과 저서 『Men, Women, and Chain Saws』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여성 생존자를 ‘파이널 걸(Final Girl)’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실제 영화 분석에 따르면 이런 구도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글로리아 코완과 마거릿 오브라이언이 슬래셔 영화 56편, 등장인물 474명을 대상으로 내용을 분석한 연구 내용을 보면, 예상과 달리 남녀 피해자의 수는 비슷했고, 공격을 당했을 때 죽을 확률도 남녀가 비슷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오히려 전체적으로 살아남은 비율은 여성 쪽이 더 높습니다. 문제는 ‘섹시‘하게 그려진 여성 캐릭터일수록 생존하지 못하는 경향이 뚜렷하고, 살아남지 못하는 남성 캐릭터 역시 부정적인 남성성과 자주 엮여 있다는 점입니다.
이 연구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성이 남성보다 많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 단순히 남녀 차별은 없다는 결과로 해석될까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섹시’한 여성과 ‘부정적‘ 남성이 주요 살해 대상자가 된다면 이 역시 심각하게 차별에 관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방식일까요? 왜 여성에게는 ‘섹시함’이, 남성에게는 ‘부정적 남성성’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기호로 변신하게 된 것일까요?
영화《할로윈》속의 ‘올바른 여자’
영화 할로윈에서 끝까지 살아남게 되는 로리는 공포 영화 팬들 사이에서 장 유명한 생존자 중 한 명입니다. 몇 번이나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늘 다음 편에 다시 살아나서 (사실은 전편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다라며) 새롭게 극을 전개해 나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녀가 살해당했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녀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인간적 특징입니다. 그녀는 신중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아이를 돌봅니다. 다른 여성 등장인물들은 가벼운 연애와 파티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데 반해 그녀는 상대적으로 행동이 조심스럽습니다. 즉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대체로 자유롭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인물일수록 빠르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 구조에서 단순하게 “로리가 현명해서 살아남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영화가 그녀를 규정짓는 모습 역시 되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현명하다고 이해하는 영화 속 여성 등장인물의 특징은 많은 경우 사회가 여성에게만 요구하는 특정한 도덕적 규범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성적 성향은 보수적(문란하지 않은)이며, 감정에 따른 충동적 행동을 피하는 것 등 말입니다.
살인마와 맞서는 로리는 강한 여성일까요? 그리고 왜 이 여성의 주변에 ‘성적으로 자유롭지만 동시에 어리석은 여자’를 등장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재미있게도 첫 시리즈의 극본과 연출을 담당한 (이후에도 계속 극본 및 제작 등으로 참여하고 있는) 존 카펜터는 이런 지적에 반대의 주장을 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영화가 성적으로 억압된 도덕률을 대변한다는 비평가들의 해석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합니다. 카펜터에 따르면 로리가 살아남는 이유는 ‘순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주변을 계속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시리즈를 처음 만든 감독 본인의 부인에도 왜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틀에 박힌 방식인 성적으로 억압된 도덕률에 바탕을 두고 이 영화를 비판한 것일까요? 사실 더 큰 문제는 감독 카펜터가 무엇을 의도했는가가 아니라, 그 의도와 상관없이 이미 영화 관객들 사이엔 이런 기호들이 특정 신호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감독 존 카펜터 역시 스스로 의식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미 고정관념처럼 견고해진 이런 사회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스크림》의 비웃음
기존 공포 영화의 뻔한 클리셰를 비틀며 등장한 영화 스크림은 랜디라는 조연을 등장시키며 고정관념을 노골적으로 과장합니다. 그녀는 “섹스하면 죽는다” 같은 슬래셔 영화의 생존 법칙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영화광 캐릭터로 분해서 우리가 너무나 익히 알고 있는 공포 영화의 생존 규칙 ”섹스를 하지 말 것. 술이나 약물을 하지 말 것. 금방 돌아올게라고 말하지 말 것“ 등을 설명합니다. 이런 장면에서 관객은 웃음을 터뜨립니다. 영화 스스로가 자신이 속한 장르의 공식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 없는 웃음으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순간을 놓치는 것인지 모릅니다. 왜 공포영화들은 이렇게 여성의 몸과 행동을 통제하려는 것일까?
스크림 시리즈의 주인공 시드니는 위에서 언급한 ’파이널 걸‘의 틀을 의식적으로 뒤집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단순히 순결하고 착한 소녀가 아니라, 공포 영화의 규칙을 인지하고 그에 대응합니다. 또 다른 등장인물 타텀 역시 자유롭고 당차며 심한 농담도 거침없는 인물입니다. 결국 스크림 시리즈는 이전의 공포 영화들이 보여주던 공식을 조롱하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기존 방식을 조롱하며 결국 다시 관객이 그 규칙을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가도록 한다면 이런 방식 역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영화적 선입견은 현실 사건에서도 같게 받아들여질 때가 많습니다. 언론에서 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등장할 때 대중은 피해자가 과연 현명한 처신을 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은 가해자가 했는데 왜 피해자에게 현명한 처신을 했는지를, 즉 피해자 자격이 있는지를 따지는 것일까요?
영화 속 남자들
그렇다면 반대로 남성 등장인물들은 여성보다 더 현명하게 그려질까요? 이런 이분법적인 단정을 내리는 것에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포 영화에서 남성이라고 반드시 현명하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꽤 많은 남성 등장인물이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위험에 빠지거나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즉 가만있으면 될 것을 “내가 해결하마”라고 나서다가 망하게 되는 것이죠.
영화 《캐빈 인 더 우즈》에 등장하는 커트가 좋은 예입니다. 일행이 갇히게 되자 커트는 오토바이로 협곡을 뛰어넘어 도움을 청하겠다고 나섭니다. 비장한 각오로 오토바이를 몰고 간 그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벽에 부딪혀서 즉사합니다.
문제는 이런 남성의 어리석음과 여성의 어리석음이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입니다. 남자의 실패는 너무 용감해서로 설명한다면 여성의 실패는 멍청해서 판단력이 부족한 것처럼 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작은 차이는 결국 대중들이 성적 차이에 관해 얼마나 잘못된 선입견을 품는지를 보여줍니다. “너무 용감해서 죽었다”와 “멍청해서 죽었다”의 서사적 차이는 엄청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비록 실패했더라도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지만 후자는 짜증만을 유발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처럼 남성의 무모함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여성의 무모함엔 멍청하다며 짜증을 내는 것일까요?
관객은 왜 그녀에게 화를 낼까
결국 중요한 질문은 영화 제작팀이 아닌 우리, 즉 영화 관객에게 향해야 합니다. 영화를 상업적으로 성공시켜야 하는 제작진은 당연히 관객이 이해하고 선호할 신호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등장인물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충고를 무시하고 위험한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관객은 이런 장면을 보며 답답해합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라고 짜증을 내며 “곧 죽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관객들이 이처럼 틀에 갇힌 반응을 반복한다면 반대로 이 틀은 제작팀에게 무척 효율적인 수단이 될 것입니다. 관객의 고정관념을 이용하여, 특정 캐릭터를 향한 감정이입을 강요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는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현실에서도 영화의 틀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특정한 외모나 행동 양식을 지닌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 많은 이들을 사로잡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잘 알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마치 영화 속 멍청한 등장인물처럼 여기기 시작합니다. 사실 영화가 먼저 고정관념을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고정관념이 영화 산업에 도입된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방향이든 저 방향이든 한번 형성된 이런 비난의 틀은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사회는 옳지 않은 선입견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성 주인공만 강해지면 해결될까
영화계 역시 이런 문제를 팽개치기만 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강한 여성 주인공들이 영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남성보다 더 강한 전사로 등장하며, 남성의 전유물이던 탐정 역할도 멋지게 수행하며, 세계를 구하는 역도 빼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성만큼이나 강한 여성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영화의 남녀 차별 요소들이 사라지게 될까요?
여성 대통령이나 수상이 선출되었다고 여성 차별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를 구원하는 여성 주인공을 만들어 낸 영화 헝거게임을 한번 생각해 볼까요? 주인공인 캣니스는 1편 첫 장면에서 활과 화살로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지간한 남성 사냥꾼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실전을 통해 입증된 냉정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영화에서 전통적으로 ‘남성적’이라 여겨진 특성을 갖춘 셈입니다. 그런데 헝거게임에 참가하는 다른 여성 참가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헝거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훈련을 받은 글리머 역시 의외입니다. 가장 위협적이어야 할 인물 중 하나인데도, 영화에서 그려진 이 여성 캐릭터는 예상보다 무능하며 동시에 필요 이상으로 여성으로서 성적 매력이 강조됩니다. 이런 대비를 통해서, 우리는 은연중에 여성 주인공 캣니스가 보여주는 ‘남성적’ 자질은 중요하게 여기게 되지만 반대로 공감이나 배려 같은 전통적으로 ‘여성적’ 자질로 인정해 온 특징을 열등하게 여기게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본다면 강한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패턴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남자 대 여자가 좋은 여자(남성적 자질을 갖춘) 대 나쁜 여자의 이분법으로 치환된 것뿐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영웅적인 여성 주인공조차 다른 여성 등장인물과 비교를 통해 우수함을 입증한다면 기존 고정관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존의 규칙에 다음과 같은 부가적 항목이 하나 더 늘었을 뿐입니다.
’여성도 살아남을 수 있다. 단지 다른 여자들처럼 행동하지 않고 남성처럼 행동한다면‘.
영화계와 관객, 누가 문제일까
우리는 세상을 둘로 나눈 후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결코 이런 식으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로 돌아가 볼까요?
영화는 사실 예술이기 이전에 하나의 산업입니다. 즉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지속 가능한 장르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제작팀은 관객에게 익숙한 위험이 적은 공식을 선택하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특징을 지닌 캐릭터를 선호하며 이런 캐릭터가 만들어 내는 서사를 쉽게 이해합니다.
슬래셔 영화를 보는 도중에 관객들의 머릿속을 사로잡은 “저 애는 곧 죽겠네.” 같은 고정관념은 관객에게 설명이 없이도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빠른 지름길을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면 커질수록 관객들의 상상력은 점차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평소엔 현명하고 착실한 여성도 파티에서 넘치는 매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넘치는 호기심에 충동적인 행동을 많이 하는 여성이 반대로 호기심 덕분에 남들보다 먼저 위험 요소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남성들이 여성보다 더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여성만큼 또는 여성보다 더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척 현실적이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이런 생각을 쉽게 수용하지 못합니다.
제작자가 관객을 탓하고 관객이 영화 자본을 비판하는 도돌이표 같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문제는 영영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영화를 보다가 뻔한 장면을 만나는 순간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어떨까요?
“왜 저 여자는 저렇게 멍청하게 행동하지?”에서 왜 이 영화는 내가 여자 캐릭터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만약 남성 주인공이 이런 행동을 한다면 얼마나 화를 냈을까? 혹시 남성 주인공이 용감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성 주인공의 무모한 행동을 남성 주인공에게선 용기라고 칭찬하기도 하며, 여성의 욕망은 헤프다고 욕하면서 남성의 욕망에 대해선 능력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똑같은 행동을 한 남성 캐릭터를 향해선 화를 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여성에 대한 차별은 노골적인 언어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누구를 더 현명하고 좋은 사람으로 설정하는지, 누가 리더인지 다른 인물에게 충고할 자격을 부여받는 지를 통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 영화를 보며 어떤 여성이 노출이 심한 모습으로 위험한 공간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면, “왜 저 여자는 말을 안 듣지?” 대신 ”왜 아직도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여자를 벌주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지’로 생각을 바꿔보세요.
결국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여성을 멍청한 모습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유는 “우리가 그 장면을 원하기 때문이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우리 스스로 답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영화 속 여성은 계속해서 위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녀가 문을 열기 전에 늘 이렇게 짜증을 내게 될 것입니다.
“왜 저렇게 멍청하지?“
과연 진짜로 멍청한 것은 누구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