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으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 트위터를 스크롤하는 모습을 봤다. 책은 완벽하게 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그날 아침 펜 스테이션 근처 ‘반스 앤 노블(미국의 유명한 서점 브랜드)’의 철학 코너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였다. 그곳에는 철학 서적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일어나는 법 과 같은 제목의 책들과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나는 그가 과연 이 고전 도서로 오랜 지혜를 흡수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출근길에서 멋을 부리는 용도로 사용하는지 궁금해졌다.
요즘은 출판업계가 ‘철학 붐’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시대이다. 2021년에 철학 및 이데올로기 서적 판매량이 전년대비 60% 이상 급증하면서 지금까지 이런 경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철학하기!”같은 이름의 팟캐스트는 수백만 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한다. 인스타그램 계정들은 석양을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세네카의 명언을 올리기 바쁘고, 팔로워들은 이런 포스팅에 ‘좋아요’를 눌러야 자신이 계몽된 것처럼 보인다고 느낀다.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문화 부흥처럼 보인다. 마침내 사회가 삶의 성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더 복잡한 방정식이 등장한다. 철학은 불안하고 야심 찬 이들을 위한 궁극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즉 내면의 평화와 외면의 세련됨을 동시에 약속하는 일종의 사치품이 되기 시작했다.
‘지친 마음’ 경제학
“문제는 마케팅이야, 정신차려!”
출판사들은 이 책들을 지적 도전으로 광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스킨 케어 상품을 팔 듯 철학이 지친 마음을 진정시켜준다고 외친다. 또한 “일상을 위한 실용적 지혜”를 제공한다고 외치기도 한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현대의 삶이 당신을 망가뜨렸고, 자기계발서로 재포장된 철학이 당신을 고쳐줄 것이라는.
물론 현대의 삶은 실제로 우리를 망가뜨렸다.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은 파편화되었다. 우리는 여러 플랫폼을 돌아다니며 각각에 맞는 자아를 관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링크드인엔 업무에 전문가적인 자아, 트위터에선 위트 넘치고 날카로운 지적인 자아, 인스타그램에서는 트렌드에 잘 큐레이션 된 자아, 그리고 로그 아웃하기만 하면 되찾을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는 진짜 자아.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역할 긴장이라 부른다. 모든 페르소나가 충돌하지 않도록 유지해야 하는 피곤한 작업이다. 여기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극심한 사회적 불안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더하면, 우리 모두는 일관성을 절실히 원하게 된다.
이 순간 철학이 구세주로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는 시장이 철학이라고 부르는 상품이. 왜 사회가 그런 파편화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불편한 질문—자본주의, 기술, 또는 우리가 살아가는 정치 구조를 고발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대신, 대중 철학 산업은 우리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린다. 질문은 “세상은 왜 이런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이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가?”로 변형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에서 마음챙김으로, 구조적 비판에서 개인적 최적화로의 변환이다.
누구든 진지하게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현상을 교묘한 형태의 자기 소외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나 스스로의 주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회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스토아적 회복탄력성에 관한 또 다른 책을 사고 더 열심히 견디려 애쓸 뿐이다.
바쁜 사람들을 위한 철학
철학을 학문에서 상품으로 변형시키려면 특정한 종류의 지적 수술이 필요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출판 의도 없이 사적인 일기로 썼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한 자기 자신을 위한 메모였고, 우연히 로마 황제였던 사람이 쓴 것이기에 진정으로 세계사적인 질문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오늘날 그 동일한 명상록은 “고대 로마의 리더십 교훈” 또는 “스토아 CEO의 성공 가이드”로 재포장된다.
이것은 적응이 아니라 축소다. 진정한 철학은 엄격한 논증, 모호성에 대한 관용, 그리고 진실이 우울할 수 있다는 수용을 요구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으며, 그것을 성찰하는 것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말이다. 반면 대중 철학은 토니 로빈스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성찰하는 삶은 당신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어야 하고 확실히 더 자신감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형식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플라톤의 《국가》는 밤새 이어지는 대화로, 정의에 관한 질문들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은 채 맴돈다. 현대 철학 팟캐스트는 출퇴근에 최적화된 15분 안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5가지 스토아 원칙”을 제공한다. 전자는 지속적인 주의력과 지적 겸손을 요구한다. 후자는 에어팟과 정보를 이해로 착각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대중 철학은 인간의 마음을 올바른 설정만 필요한 기계처럼 취급한다. 불안한가? 이 세 가지 스토아 라이프 핵으로 인지 부품을 조정하라! 이런 기계적 의식관은 역사상 대부분의 철학자들을 경악하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 경험이 그 과정들의 합보다 더 크다는 것을, 지혜는 존재의 전체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복잡성은 확장될 수 없다. 모호함을 대량생산할 수 없고 의심을 상품화할 수 없다. 그래서 시장은 단순화를 요구하고, 그 결과 우리는 철학을 목록 기사와 동기부여 명언의 연속으로—인스타그램 사각형에 깔끔하게 맞는 지혜로—얻게 된다.
철학으로 플렉스 하기
여기서 특히 흥미로워진다. 많은 소비자들에게 요점은 실제로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것을 했다는 것, 또는 최소한 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자본 개념을 제시했다. 지식과 취향이 사회적 화폐로 기능한다는 아이디어다. 인스타그램 시대에 이 화폐는 그 어느 때보다 가시적이고 가치있다. 침대 옆 탁자에 《명상록》 사진을 게시하는 것은 당신이 철학을 읽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신호다. 그것은 말한다. 나는 사려깊고, 깊이가 있으며, 피드를 무심코 스크롤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이 사진을 게시하는 것 자체가 무심한 스크롤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연구자들이 “진단적 효용”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행동으로 그 특성을 보여주는지와 무관하게, 우리가 원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에서 얻는 만족감 말이다. 철학 책을 사면, 나는 철학적인 사람이다. 그것에 대해 게시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깊이를 신호한다. 실제로 그것을 읽는지는 거의 부차적이 된다.
소셜 미디어는 이런 역학을 터보차지했다.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은 복잡한 주제에 대한 빠른 의견과 자신감 있는 견해에 보상한다. 이것은 철학과 근본적으로 정반대다. 철학은 한 학자가 말한 “명료함을 달성하기 위한 끈질긴 투쟁”을 요구한다. 5분 전에 확신했던 것들에 대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발견하는 과정 말이다. 하지만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아요를 받지 못한다. 인용 트윗으로 니체를 자신있게 설명하는 것은 받는다.
결과는 지적 미덕 신호다. 유행하는 주제에 대해 빠르게 제시되는 의견들로, 진리 가치보다는 사회적 가치 때문에 채택된다. 지혜의 외양이 지혜 그 자체를 대체한다. 참여를 급락시키는 것은 겸손보다 빠른 것이 없다.
브로이시즘: 철학이 남성성 위기를 만날 때
대중 철학의 어느 구석도 이것을 비평가들이 “브로이시즘*”이라 이름 붙인 것보다 더 잘 보여주지 못한다. 구조, 강인함, 그리고 그들이 잃어버린 남성적 이상이라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특정 젊은 남성 집단의 스토아 철학 전유 말이다.
데이터는 놀랍다. 온라인 스토아 커뮤니티 참여자의 60%가 남성이며, 일반적으로 40세 전후다. 그 매력은 남성적 불안—역할 모델의 부재, 표류하는 느낌, 현대 생활이 거친 자립 대신 감정 표현과 협력 기술을 요구함으로써 남성을 거세했다는 느낌—을 중심으로 명시적으로 프레임된다.
어려운 시기에 남성들이 철학을 찾는 것 자체에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 문제는 브로이시즘이 종종 “스토아주의”(대문자 S, 이성, 정의, 공동체 덕성을 강조하는 복잡한 고대 철학)를 “스토아적 태도”(소문자 s, 감정 억압과 터프가이 자세의 현대적 문화 이상)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절제, 정의, 모든 이성적 존재의 근본적 평등에 대해 썼다. 현대 스토아 인플루언서들은 “당신의 감정을 정복하고” “하루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게시한다. 에픽테토스는, 그 자신이 전 노예였는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의 한계와 우리의 힘 너머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썼다. 그의 현대 해석자들은 “절대적 책임을 지는 것”과 “변명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가장 명백한 왜곡은 이런 커뮤니티가 비판에 반응하는 방식에 나타난다. 스토아주의는 역사적으로 정치와 시민 덕성에 깊이 관여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결국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문제들이 발생하면, 많은 온라인 스토아주의자들은 정치적 참여를 “미덕 신호”로 치부하거나 진정한 스토아주의자는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는 거의 스토아적이다. 그들은 스토아주의가 실제로 요구하는 종류의 자기 성찰을 피하기 위해 스토아주의를 인용한다.
*브로이시즘: 2019년 미국 시티 칼리지 뉴욕의 철학 교수 마시모 필리우치(Massimo Pigliucci)가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그리스 철학의 스토아주의(stoicism)가 현대에 와서 온라인과 ‘테크 브로’ 문화를 타고 표피적 의미만을 차용하여 남성성, 외적 성공, 감정 억압을 강조하는 현대적 변형이 된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
대중 철학의 역설
아마도 철학 붐 현상이 불러오는 가장 큰 모순은 사회적 인정 즉 타인의 시선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철학이란 장르를 각 개인이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용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진정으로 통제하는 유일한 것은 우리 자신의 판단과 선택이라고 가르쳤다. 그 밖의 모든 것—부, 지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우리 자신과 무관하다. 다시 말해 스토아철학의 실천 목표는 사회적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당신이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이지 단지 자신을 더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기 위함은 아니다.
스토아철학을 지지한다고 하는 인플루언서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게시물을 올린 후 자신이 올린 포스팅의 반응을 확인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사람들이 갑자기 존재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사피엔스》나 《미움 받을 용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도시 전문직 계층 사이에서 일종의 문화 계급으로 인정받는 지위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철학 책 판매량이 급증하는 것은 아닐까?
좋아요와 팔로워 수에 집착하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진정한 철학적 사고 방식과 같을 수 없다.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은 회의를 하는 생각 자체를 바이럴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사고의 회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앎(knowing)과 사고(thinking싱킹) 사이에 구분선을 두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앎은 단지 정보를 습득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 반해 사고는 어렵고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한 행위로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인기 높은 최근의 철학적 흐름은 앎(이론과 인용 등)의 소개에만 그치며 실질적인 사고 행위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깊은 사고 행위는 오히려 번창하는 ‘철학 사업’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지한 성찰을 통해 철학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최근에 유행하는 철학적 컨텐츠들이 과연 여러분의 삶에 필요한 것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 서적들이 팔리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은 우리가 지적 제로 칼로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장려한다. 마치 우리의 정신에 영양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근본적으로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는 콘텐츠들 말이다. 결국 우리는 한정판 운동화나 빈티지 비닐 레코드를 수집하는 것처럼 그저 지혜라고 인정받는 상품들(책 등)을 수집하는 것뿐이다.
이런 현상이 불러오는 비극은 진정한 철학은 실제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을 읽는 것은 정의를 보는 방식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으며 키에르케고르와 씨름하는 것은 의심과 믿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재구성할 수 있다. 시몬 보부아르를 만나는 것은 자유와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철학을 판매되는 제품이 아닌 스스로가 인식하고 실천해야 하는 행위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희망의 한 줄기 빛
하지만 이런 지식의 상품화 속에서도 우리는 몇몇 낙관론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 붐은, 아무리 잘못된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현재까지의 문화가 제공하지 못했던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갈망을 느끼게 만든다. 사람들은 삶에 최적화와 생산성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기술과 소비재가 다룰 수 없는 질문에 대한 의미, 틀, 답을 찾고 있다.
철학의 대중화는—축소되고 상품화된 형태일지라도—관문 역할을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명상록》을 라이프스타일 액세서리로 샀다가, 자신도 모르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이 피해온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카뮈에 관한 틱톡 영상이 실제로 《시시포스 신화》를 읽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팟캐스트가 누군가에게 철학 수업을 듣도록 영감을 줄 수 있다.
핵심은 소비에서 실천으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것이다. “기업가를 위한 에픽테토스”가 아니라 에픽테토스를 읽으라. 월요일 아침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으로 정리된 누군가의 요약이 아니라 세네카의 편지를 읽으라. 혼란스러울 것을 예상하라. 동의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라. 이 고대 사상가들이 때때로 자기 자신과 모순되고, 때로는 당신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주장하고, 때로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종류의 도덕적 진지함을 요구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을 예상하라. 이 혼란은 버그가 아니다. 그것이 기능이다. 철학은 당신이 이미 믿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교육자들에게는 철학적 실천을 자기계발 경영 실무와 적극적으로 구별하는 과제가 있다. 출판사와 플랫폼에게는 구조적 과제가 있다. 바이럴성보다 깊이를, 참여보다 관조를 보상하는 경제 모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것은 자본주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진정으로 어렵다. 하지만 지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 사이의 긴장을 인식하는 것이 철학이 단순한 또 다른 브랜드 이상이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첫 번째 단계다.
콘텐츠 시대의 성찰
우리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시대적 문제점 자체 마저도 상품화가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반자본주의가 인쇄된 티셔츠를 사고, 물질주의를 피해야 한다며 60만원짜리 특강을 선전한다. 철학조차도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맥락 하에서 철학은 수제 커피나 부티크 피트니스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을 내포한다. 사실상 철학은 우리가 현재 안고 있는 시스템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몇 안 되는 행위 중 하나다. 만약 철학이 지금처럼 자본주의에 굴복한다면, 허버트 마르쿠제가 경고했던 “일차원적 사고”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현재 존재하는 시스템 내에서는 기능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진정으로 성찰하지 못하는 사고 말이다.
지난 주에 보았던 지하철의 그 남자는 어쩌면 명상록을 평생 열아버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혹시라도 자신에게 밀려드는 소셜미디어의 피드에 질려서 우연히 자신이 구매한 책을 열어보게 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진정한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무관심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같은 질문들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질문은 마케터들이 그에게 팔려고 노력하는 질문들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다가울지도 모른다.
철학은 책에서 말하듯 아침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일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도구가 아니다. 철학은 오히려 당신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급하게 달려가고자 했던 삶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묻는다.
철학은 절대 단순한 비결도, 삶에서 만들어 나가는 습관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브랜드도 아니다. 단지 끊임없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단순하게 묻게 만드는 질문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젠 유행하는 철학 서적을 던져 버리고 스스로에게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때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