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르고’는 언제부터 ‘느림’을 의미했을까?
현대인의 삶은 늘 복잡하고 시끄러운 상황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불안과 초조의 감정으로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텐데요, 이럴 때 아름다운 음악은 우리의 정서를 한결 여유 있고 편안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음악이 주는 안정감은 단지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음악을 통해 여유와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요소로 바로 ‘템포’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템포를 나타내는 말 중에 ‘라르고’라는 빠르기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이 ‘라르고’가 있기에 우리 삶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거든요.
Largo의 본래 의미는 ‘느리다’가 아니라 ‘넓다’
만약 당신이 고전 음악 애호가라면 ‘라르고’라는 빠르기말을 듣는 순간 거의 무의식적으로 귓가를 스치는 멜로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그 멜로디는 바로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Xerxes)》에 나오는 아리아 “Ombra mai fu”의 첫부분입니다. 작곡가가 악보에 표시한 빠르기는 원래 라르게토였다고 하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음악팬들은 이 곡을 첫 가사를 딴 제목 대신 ‘라르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리아는 다음과 같은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선율만큼이나 편안하고 여유로운 싯구인데요
Ombra mai fu / Never was a shade 이만한 그림자는
di vegetabile, / of any plant 어떤 나무도 드리우지 못했다
cara ed amabile, / dearer and more lovely, 무척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soave più. / or more sweet. 그래서 더욱 더 달콤한
가사가 의미하는 것처럼 느리고 평온한 삶이 갖는 달콤함을 느끼게 해주는 느린 템포와 감미로운 멜로디가 백미입니다. 유려한 리듬을 따라 vegetabile와 amabile가 운율을 이루며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가사가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에서 ‘라르고Largo’의 원래 의미는 영어로 ‘broad’, ‘wide’, 즉 ‘넓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느리다’는 속도의 개념을 담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넓다’라니 도대체 왜 이런 의미의 변화가 생겼을까요? 이 단어를 음악의 빠르기말로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음악가들 머릿속에서 ‘느림’이란 템포가 무엇을 의미했을지 궁금해집니다.
“길을 비켜라!”—피가로의 “라르고 Largo”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주인공 피가로가 처음 등장하며 부르는 아리아는 바로 이 ‘라르고 Largo’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아리아 역시 종종 ‘라르고’라고 불리는데요, 이 아리아를 들어보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라르고Largo가 어떤 의미인지 분명해집니다.
Largo al factotum della città Make way for the city’s factotum
이 도시의 일꾼을 위해 길을 비켜라!
Largo! Wide! 넓게!
바쁜 아침, 피가로는 자신을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일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빨리 출근해야 하니 사람들에게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지말고 넓게 퍼지라고 요구하지요. 그렇습니다. 이탈리아어에서 라르고는 속도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넓다’는 의미를 가진 ‘라르고’라는 이탈리어어의 단어가 어떻게 ‘느린 템포’를 지칭하게 되었을까요?
바로크 시대 전후 유럽 음악계를 휩쓸던 이탈리아는 자신들의 말로 음악 용어를 하나씩 정의해 나갑니다. 이때부터 속도가 아닌 넓이의 의미를 담고 있던 라르고가 템포를 지칭하는 빠르기말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BBC Music Magazine의 Stephen Johnson에 따르면, 18세기 당시 음악가들 사이에서 ‘라르고 Largo’는 지금과 달리 ‘아다지오 Adagio’보다 오히려 빠른 템포를 의미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혼란을 정리한 사람은 음악가가 아니라 철학자였습니다. 장 자크 루소가 이 ‘라르고 Largo’란 빠르기를 음악에서 가장 느린 템포를 가리키는 빠르기말로 규정했고, 이후 작곡가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루소는 철학자이자 문인이었지만 동시에 작곡도 했던 다방면의 천재였나 봅니다.
하지만 왜 철학자 루소는 Largo를 ‘가장 느린’ 템포로 규정했을까요? 혹시 이 철학자에게 ‘넓음’과 ‘느림’ 사이의 어떤 본질적 연결이 보였던 것은 아닐까요?
넓음을 담는 느림—베토벤의 선택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폭풍’》 1악장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보여줍니다. 빠르기가 ‘Largo-Allegro’로 지정된 이 첫번째 악장은 시작부터 거의 호흡이 멎는 듯한, 시간이 멈춰지는 순간들이 지나갑니다. 그러고 나면 곧 다양한 감정을 응축한 빠른 패시지가 반복됩니다. 베토벤은 느림과 빠름을 대비시키며 행위를 멈추고 깊은 생각에 빠지는 아주 짧은 틈을 음악의 공간 사이에 창조해냅니다.
즉 여기서 ‘라르고 Largo’는 단순히 느림을 표시하는 게 아닌, 많은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넓은’ 사고를 의미합니다. 음악 속에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담길 수 있는 여백 말입니다.
부재의 고통을 견디는 시간—드보르작의 향수
‘Largo 라르고’로 유명한 또 다른 작품으로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 2악장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드보르작의 라르고는 또 다른 종류의 ‘넓은 생각’을 보여줍니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독일 음악계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지휘자 첼리비다케는 특히나 느린 템포로 유명합니다. 첼리비다케가 지휘한 이 곡에서 우리는 작곡자처럼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지휘자가 겪는 향수라는 감정의 본질을 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보헤미아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작품 《향수》에서 체코어로 된 가장 감동적인 표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작가에 따르면 이는 “나는 너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 2악장 ‘라르고 Largo’는 단지 느린 음악이 아닙니다. 부재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넓은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향수란 감정은 그저 빠르게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닐테니까요.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떠오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고통을 견딜 만큼 충분히 ‘넓은 시간’을 허락받고 있을까요? 아니,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있을까요?
숨겨진 고뇌 — 쇼스타코비치의 딜레마
20세기 초반의 스타 작곡가인 러시아 출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3악장 라르고 Largo는 이제까지 살펴본 라르고 Largo와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유명한 4악장 ‘Allegro non troppo’ 앞에 펼쳐지는 이 느린 악장은, 스탈린 치하에서 음악가로 살아남아야 했던 쇼스타코비치의 고뇌와 울분이 드러납니다. 곡이 발표된 초기에는 “위대한 소비에트 공화국의 행진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악장으로 해석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작곡가의 아들이 쓴 전기를 통해 작곡가의 숨겨진 내면의 고뇌가 밝혀진 이후, 지휘자들의 해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3악장 라르고 Largo는 오히려 작곡가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습니다. 체제가 요구하는 속도, 즉 위대한 소비에트 인민공화국의 빠른 전진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과연 ‘느림’은 세상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을까요? 모두가 빠르게 달리기만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에서, 천천히 걷는 다는 것은 어쩌면 진정한 용기일지도 모릅니다.
빛을 멈추게 하는 미술가: James Turrell의 작품들
음악이 시간 예술이라면 미술은 공간 예술입니다. 그렇다면 미술에서는 ‘라르고 Largo’의 지점을 어떻게 시각화하고 있을까요?
“빛의 마스터 Master of Light”라고 불리는 설치미술가 James Turrell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현재는 마치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설치미술가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빛을 해체한 후 고정된 공간안에 멈추게 함으로써 실재의 세계를 마치 환상처럼 전이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변해가는 빛의 색상들을 활용해 다양한 시각적 효과를 구현하는 그의 작품을 관찰하다보면 무한히 늘어진 시간의 틈이 느껴집니다. 그런 무한의 시공간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는 놀라운 순간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 바로 역설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5G의 속도로 연결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터렐의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한 시간씩 멈춰설 수 있는 것일까요? 빛처럼 빠른 미세한 차이조차 기술 혁신이라 부르는 지금, 어떻게 우리는 정지된 시공간에서 변화하는 빛을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게 되는 것일까요?
느림은 사치인가, 저항인가
피가로는 모두를 향해 “라르고 Largo!”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길을 비켜, 나에게 공간을 넓혀줘! 현실을 살기 위해 그는 무척이나 바쁘게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헨델의 ‘라르고 Largo’는 정반대입니다. 멈춰라. 머물러라. 이 그늘 아래에서! 이보다 더 사랑스럽고 달콤한 것은 없을 테니.
여러분은 과연 어떤 ‘라르고 Largo’의 빠르기 속에서 살고 있나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 앞을 넓혀달라고 외치는는 라르고 Largo인가요, 아니면 잠시 그대로 머물러도 좋은 여유를 넓혀달라고 외치는 Largo인가가요?
인공지능으로 인해 점차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더 깊이 생각함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충분한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Largo는 음악 용어이기 전에 삶의 태도입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시간을 넓히는 선택입니다.
마지막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오늘, 얼마나 ‘넓은’ 시간을 살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