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새벽 배송이라는 혁신적 서비스(업체의 주장에 따르면)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새벽 배송을 제공하는 업체의 배송 관련 노동자들이 심야 노동으로 인한 과로로 2021년부터 지속적으로 사망하게 되었다는 노조측의 주장을 두고 정치권에서 새벽배송을 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제를 던진 것인데, 미디어와 SNS 공간에서는 곧바로 이를 놓고 격렬한 찬반 대립이 시작되었다. 한편이 “이미 일상이 된 혁신을 왜 막느냐”고 묻자, 다른편에서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편의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반발한다. 그러면 다시 “왜 혁신 서비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냐?”는 재반발이 등장한다.
이렇게 말과 말로 서로의 이념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가운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있다.
바로 우리, 즉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의 삶이다. 새벽배송은 정말로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고 있는지,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워진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타인의 심야 노동으로 덮어두고 있을 뿐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우선 법적 제재의 반대편 논리를 살펴보며 그 주장의 어딘가에 과연 우리 즉 인간이 담겨있을지 한번 찾아보자.
새벽배송 찬성 논리
새벽배송은 내 삶의 필수다
새벽배송은 저녁 늦게 주문한 상품을 다음 날 아침 7시 이전에 배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여타 선진국들과 비교할 때 평균적으로 훨씬 더 긴 업무 및 출퇴근 시간에 시달리는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늦은 저녁 시간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은 분명한 편익이다. 갑자기 필요한 물품이 생겼을 때, 예전 같으면 발만 동동구르며 무기력하게 화만 내고 있을 상황에서 이제는 스마트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기저귀와 분유 같은 육아용품부터 신선식품까지 다양한 니즈를 충족시키는 새벽배송은 특히 맞벌이 가구, 1인 가구, 영유아를 돌보는 가정등의 강력한 지지를 업고 폭발적으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새벽배송을 지지하는 소비층이 이토록 두텁게 존재하기 때문에 기존 건설현장이나 제조공장 등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하던 경우와 달리 민주노총이 제기한 새벽배송 법적금지 주장은 예상보다 많은 반대에 직면한 상황이다.
일부에서는 예전에는 새벽배송이 없어도 잘만 살았다는 감정 섞인 비아냥으로 반대편을 비난하기도 하는데, 새벽배송에 대한 지지를 이처럼 단순히 “게으름”이나 “비계획성”으로 몰아가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이 논쟁의 깊은 곳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불만이 감춰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단 개인 기호에 따른 선택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사회 구조적 문제에 먼저 초점을 맞춰볼까 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근로자들은 OECD 국가 중에서도 유독 장시간 노동과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이 긴 사회다. 오직하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가 역대 최고 선거 캠페인으로 여겨지겠는가. 만약 퇴근 후의 시간이 충분히 보장되고, 돌봄과 가사 노동이 개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지 않는 사회였더라도, 새벽배송에 대한 지지가 지금처럼 절박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워킹맘(한국의 맞벌이부부 중 여성 가사 분담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이나 혼자 아이를 키우는 외부모 그리고 점점 증가하는 1인 가구들이 겪는 어려움은 ‘게으름’이나 ‘비계획성’ 같은 개인의 능력 부족에서만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돌봄과 노동의 부담이 개인에게 집중되도록 설계되고 운영돼 온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낳은 결과인 것이이다.
그렇다면 비록 새벽배송이 이런 부족함을 일부 메워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새벽배송이 계속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할까?
삶이 이미 충분히 힘든 상황에서, 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해 주는 서비스가 있다면 누구라도 그 서비스를 계속 받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 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 삶이 어렵고 힘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고 고쳐야지 문제점으로 드러난 현상의 일부를 회피하기위해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새벽배송이 절실할만큼큼 삶이 힘들어진 원인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는다면 새벽 배송은 현재 드러난 문제를 아직은 크게 다가오지 않는 또 다른 문제로 잠시 대체할 뿐이다.
경제와 고용 촉진을 위하여
새벽배송 중단이 유통 산업 전반에 큰 타격을 주고, 중소상공인과 농가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물론 이들의 주장처럼 단기적으로는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특정 유통 방식이 사라진다고 해서 해당 상품에 대한 수요 자체가 장기적으로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유통 채널의 변화는 늘 존재해 왔고, 그 위험은 새벽배송이 유지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고용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배송을 담당하는 근로자들 역시 새벽배송을 강력하게 원한다고 한다. 실제로 쿠팡 배송 근로자들의 모임인 쿠팡파트너스연합회(CPA)의 조사에 따르면, 배송 기사의 93%가 심야 배송 제한에 반대했으며, 95%는 야간 배송을 계속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교통 혼잡이 적고, 수입이 더 높으며, 낮 시간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선택이 언제나 자유롭고 충분한 정보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불편한 예를 한번 들어보자. 왜 국가 개인이 원하더라도 마약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가. 마약을 하는 사람 누구에게 묻더라도 그들은 마약 사용을 선호할 것이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공공장소가 아닌 곳에서 혼자 몰래 한다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없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통증이 심한 데 마약이 통증을 줄여준다고 할 수도 있고, 창작을 하는데 마약이 창의력을 높여준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마약 투여를 허용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물론 어떻게 마약과 새벽배송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냐고 비난할 수 있다. 분명히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마음속으로 그와같은 비난을 할 것이다. 마약은 나쁜 것이고 새벽배송은 나쁜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더 깊이 고민해본다면 전혀 근거없이 보이는 이 비교의 근원에 은근히 타당한 이유가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마약을 금지하는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 판단 때문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발생하는 마약 중독자의 건강 문제로 인한 비용을 개인의 선택 때문에 결국 공동체 전체가 부담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흡연 규제 이유도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심야 노동이 야기하는 위험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고려해봐야 한다. 당장은 문제가 드러나지 않겠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지금은 많지 않은 새벽배송 근로자들의 건강 문제가 심각해질 확률이 높고 그렇다면 그 비용은 결국 사회 전체에 부과되게 된다. 즉 각 주체들이 원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당장은 편익이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더 큰 관점에서 문제들을 살펴야 하며 장기적으로 문제 요소가 있다면 사회가 이를 무조건 허용하기 전에 단기적 편익과 장기적 손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피해와 보이지 않는 사람들
새벽배송은 소비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새벽 시간대의 소음, 대기오염, 주거 환경의 변화 등은 서비스 이용 여부와 무관하게 누군가에게는 작든 크든 피해를 끼친다. 물론 이것이 새벽배송을 즉각 중단해야 할만큼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서비스가 모든 이들에게 완전히 ‘무해’하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직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중요도가 낮아 보이는 그렇기에 논쟁에서 흔히 배제되는 이런 문제가 정작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일지도 모른다. 즉 이 문제를 놓고 찬반 논리의 구조적 대립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이 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개별 구성원인 시민을 향한 관심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제기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즉 우리 아닌가?
결론 :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새벽배송을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결국은 인간적으로 살고 싶어서 그 입장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왜 이 서비스를 필요로 하거나 거부하는가. 그리고 이 선택이 단기적 편익을 넘어 장기적으로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남기는가.
콜센터에 전화를 걸때마다 듣게 되는 멘트처럼 배송 노동자도 “누군가의 자녀이자 부모다”. 만약 당신의 가족이 어느 겨울 새벽, 홀로 일하다 쓰러지는 그 노동자라면 그래도 단순히 편의와 이익을 따질까?
결국 새벽배송을 유지할 것인가, 제한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당신의 자녀가 또는는 당신의 부모가 어느 겨울날 새벽에 쓸쓸히 가슴을 부여잡고 길모퉁이 어딘가에 쓰러진다는 상상을 해보며, 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당신이라면 어떤 심정일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해보는 것 말이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공포의 군주제》(The Monarchy of Fear)에서 현대 사회의 병폐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공포와 혐오에 사로잡혀 ‘우리 편’만 인간으로 보고, ‘저쪽’은 추상적 숫자나 방해물로 취급한다. 그리하여 복잡한 인간의 고통을 ‘내 편의 이익’과 ‘저쪽의 비용’이라는 단순한 회계 장부로 바꿔버린다.”
새벽배송 같이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사례들을 살피다 보면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찬성 반대의 논리가 관점에 따라 모두 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의 논리가 상대 집단의 논리보다 더 옳다라는 독선을 버려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개인과 개인 또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해야 한다. 결코 나의 편익이 누군가의 희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간단하고 명백한 사실을 회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