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가 만들어낸 문해력 논란

'심심한 사과’ 논란을 시각적으로 표현. 두 가지 의미(지루하다 vs 깊다)를 대비시키는 이중적 이미지. 스마트폰 화면, 분노한 이모티콘과 깊고 조용한 물결 이미지를 대칭으로 사용

지루한 맛

당신이 식당 주인이라고 상상해보자. 손님이 불평한다. “사장님 오늘 미역국 간이 심심하네요.”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A) “죄송합니다, 소금을 가져다 드릴까요?”
B) “아니, 국물 맛이 재미없다고요? 왜 심심하지? 제가 재미있는 개그라도 들려드릴까?”

만약 B를 선택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아마도 얼마전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심심한 사과’ 논란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논란의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기업이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사과문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러자 그 사과문을 본 네티즌들이  댓글창에 달려들어 겨울 산불처럼 커다란 불꽃이 타올랐다.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가 왜 저따위야?” “지루한 사과를 받으라고?” “이게 진심이야?” “감히 사과하는데 재미가 없다는 말이 뭐야?” 분노한 네티즌들은 해당 기업의 사과하는 태도를 무성의하다고 비난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이들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얼마나 무식하길래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도 모르나?” “큰일이다. 인터넷 세대의 문해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특정 계층을 향한 인신공격적인 댓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한 이 심심한 소동의 본질은 정말 ‘문해력’ 문제에 있을까?

우리 뇌의 문장 해석 장치가 고장났다

언어학적으로 인간의 뇌는 단어가 사용된 특정 문장 속에서 어떤 고유의 의미를 갖는지를 해석하는 문장 해석 능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단어라도 사용된 문장 속에 함축된 의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해야 하는데 이처럼 뇌가 자동 문장 해석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황별로 단어의 의미를 크게 고민하지 않고 자동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저 사람 참 독하네.” 라고 노트에 쓰인 문장을 본다면 ‘독하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시험 기간에 밤새 공부하는 친구를 보며 다른 친구들끼리 이런 표현을 쓴다면 그들은 그 친구가 대단하다는 의미에서 ‘독하다’ 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업무 성과를 혼자 독차지하려고 사장에게 다른 동료를 험담하는 사람에게 ‘독하다’라는 표현을 쓴다면 그 말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독하다’는 ‘못됐다’ 또는 ‘나쁘다’라는 의미를 전달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대화를 할 때 특별한 노력없이 이런 전환을 능숙하게 해낸다.

또다른 예로 “아직도 배가 고프다”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자. 점심시간에 다 같이 모여 밥을 먹은 후에 누군가가 이런말을 하면 그 사람이 무척 대식가라던지 아니면 요즘 뭘 잘못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것이지만, 어떤 스포츠 스타가 인터뷰에 나와서 이런 표현을 한다면 자신의 성취에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구나 라는 이해를 하게 된다. 

이런 예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단어를 단순히 단어의 정의로 이해하지 않고 그 단어가 사용된 문장 또는 대화 상에서의 맥락을 통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원래 맥락을 이해하며 의미를 주고 받는 동물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뇌에 들어있는 이 기능이 고장난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마치 문서편집 프로그램의 자동완성기능처럼, 대화나 문장 독해에 있어서, 단어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떠 오른 즉 선입견에 기반을 둔 검색을 통해 채택해버린다. 심심? 아, 지루하다는 뜻이지. 끝. 

상식과 배려가 사라진 풍경

이런 경향들이 단지 인간의 뇌에 담겨있는 언어의 해석과 관련한 기본적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그 역시 문제의 배경에 담겨있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즉 그들이 주장하는 자동완성기능의 고장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우리 사회에 문해력 문제가 던져진 것은 어쩌면 뇌의 기능이나 문학과 관련한 학습량의 부족 같은 문제 이전에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던 사회적 시스템의 고장났기 때문은 아닐까? 

이와같은 통찰을 뒷받침할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다. 당신은 과연 甚深(심심)이라는 한자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나? 다시 말해 ‘심심한 사과’의 사전적 의미를 기존에 이해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심한 사과’를 관성적으로 써 온 것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관성적으로 사용함에 있어서 의미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과연 甚深(심심)이라는 한자 단어를 알고 모르는 것이 문해력 문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문제의 본질은  ‘어떤 회사에서 인터넷에 공식 사과문을 올리는 데 지루하다는 뜻을 지닌 단어를 쓸 정도로 무식할 리는 없다’는 ‘상식’이나 혹은 내가 잘 모르는 의미가 담겨 있을 수도 있으니 상대의 의도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파악해 보자는 ‘배려’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 중 상당수는 그것이 甚(심할 심)과 深(깊을 심)으로 이루어진 한자어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들은 그냥 이게 ‘진지하고 깊은 사과’를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이라는 걸 문화적으로 학습했을 뿐이다. 또는 진지하고 깊은 사과라는 의미까지도 모른 채 문서상으로 사과를 할 때는 그 앞에 왠지 몰라도 ‘심심’을 붙여야 격이 있어 보인다는 사회 활동에 필요한 눈치를 터득한 정도일수도 있다.

3시간 음모론은 정주행, 3분 설명은 30초 컷

이런 경향 속에서 더욱 아이러니하게 다가오는 현상은, 대중들이 의외로 복잡한 것에는 놀라울 만큼 관대하다는 점이다. 

유튜브에서 “투표가 조작되었다”는 영상은 보고 또 돌려본다. 한국 정치를 양분하는 두 정당이 모두 자신들이 불리한 결과를 얻었던 선거에 대해 조작설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외에도 숱한 정치, 연애 등과 관련된 내용들은 설사 온갖 비약과 억측으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끝까지 보고 “그럴 듯한데?”라고 생각한다. 한술 더 떠서 이런 SNS에 떠도는 출처 불명의 정보를 나 혼자 소비하기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무비판적으로 공유한다. “누가 얼마를 받았다더라” “누가 누구와 사귄다더라” “뭘 먹으면 암이 완치된다더라” 이와같이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많은 소문들이 온라인에 넘쳐 흐른다. 당신이 공유한 영상이나 피드에 근거가 있나? 라고 물으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라는 답변이 되돌아온다. 대중의 특징은 자신들이 공유하는 소문은 일단 믿고 본다.

그런데 정작 눈앞에 있는 사람의 진실된 설명은 단 10초도 집중하지 않고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하며 감정적으로 반발하기 일쑤다. “심심한 사과? 어떻게 잘못했다고 하면서 심심하다고 해. 그게 말이야 말밥이야?” 잠깐이라도 검색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요즘같이 통신이 발달한 세상에선 단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어디에서도 온라인으로 사전을 찾아볼 수 있는 한국에서 말이다.

우리는 멀리 있는 복잡한 거짓말은 쉽게 믿으면서, 가까이 있는 단순한 진실은 의심한다. 이게 정말 ‘문해력’ 문제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문제일까?

제로섬 게임의 언어

이런 현상의 배경에 어쩌면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제로섬 사고’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정치 토론 등에서 시작된 이런 경향이 어느새 일상 대화까지 침투한 것이다. 내가 옳으면 상대가 틀렸고, 상대가 옳으면 내가 틀렸다. 중간이 없다. 함께 옳을 수도 없고, 둘 다 부분적으로 맞을 수도 없다. 민주주의의 본질이 ‘다수는 옳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수 의견도 경청하라’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정치인들이 TV 토론에서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끊어버리는 모습에서 좌절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매일 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더군다나 언론은 한술 더 떠서 복잡한 이슈를 “A 진영 vs B 진영”의 프레임으로 단순화하려고만 한다. 교육은 대학입시에 매몰된 채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에 점철되고 있다. 독서를 하고 그 안에 담긴 맥락을 읽어내는 사고 훈련은 우리와는 먼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젊은 세대에게 “상대의 의도를 헤아려보세요”라고 말하는 건 어쩌면 가혹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문해력은 어휘력이 아닌 ‘사람 읽기’ 능력일지도

생각해보면 ‘심심한 사과’ 논란의 핵심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지 특정 한자를 더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숨어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상대의 말을 해석할 때 상대를 배려하며 상대의 의도를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 보다 공격적인 뜻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단정을 하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이상하네? 이게 무슨 뜻일까? 내가 잘못알고 있었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 대신 “저 사람이 틀렸네!”라는 확증을 우선적으로 갖기 시작했을까?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건, 어쩌면 글자를 못 읽는 게 아니라 사람을 못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텍스트 뒤에 있는 인간의 의도와 맥락을 읽어내는 능력 말이다.

누군가 낯선 표현을 사용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자 실력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저 사람은 왜 저런 표현을 썼을까?’ ‘내가 모르는 용법이 있나?’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유 말이다.

잠시 가슴 가득 여유를 품어보자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음에 누군가 이해되지 않는 표현을 쓰거든, 감정을 싣기전에 일단 검색창을 열어보자. 분노의 댓글을 쓰는 데 걸리는 시간(평균 2분)의 절반만 투자하면 인터넷으로 그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 AI에게 물어보면 친절하게 정리해 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상대가 틀렸다면? 그때 가서 “아, 이건 사실 이런 뜻이에요”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면 어떨까? 인간이면 누구나 실수를 하거나 틀릴 수 있다. 여러분도 나도 매일 뭔가를 틀린다. 그게 인간이다. 그렇게 틀렸을 때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배우고 깨우쳐 더 좋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이 가진 독특한 장점이다. 낚시에 걸렸던 물고기는 풀어주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미끼를 문다. 실수를 통해 배우지 못하면 우린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에 불과할 뿐이다.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문해력 문제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그 원인을 되돌아보고 실수에서 뭔가를 배우려 하기 보다, 지금처럼 사교육 시장의 새로운 기회로만 여기며 접근한다면 우리 사회는 문명이 아니라 야만으로 퇴보하고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건 단지 더 많은 어휘 지식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여유와 관용의 마음일지 모른다.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윤리적인 태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함 같은 것 말이다. 즉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는 아마도 단순한  ‘문해력’ 부족이 아니라 ‘경청력’ 부족일지 모른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단어뜻 교육만 시킨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심심한 사과 논란은 끝났지만,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진정으로 귀담아 듣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나의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 반박할 틈만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당신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려보라.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었는가, 아니면 반박할 지점을 찾느라 중간부터는 듣지 않았는가? 답은 당신만이 알 것이다. 솔직하게 스스로 답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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