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정의란
최근 글로벌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기후 정의(Climate Justice)’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기후 정의란 현재 지구상에 생겨나는 환경 문제(기후 변화가 초래한)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왜 원인 제공자와 피해자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지를 살펴보려는 운동이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그리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환경 문제로 인한 피해는 주로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되곤 한다. 이렇게 기후 문제를 놓고 사회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불평등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기후 정의 운동을 벌이는 단체들은 아동, 노약자, 여성, 소수 인종, 빈곤층 등 기후 위기에 취약한 이들을 대변하고 있으며 점차 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도가 높은 사회적 담론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순
그런데 이런 기후 정의 운동은 특정 부분에서 우리에게 많은 자기성찰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인류의 생존을 도모하고자 했던 시민 사회의 순수한 노력에 자꾸만 특정 집단이 주도하는 정치적 정체성이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에서 기후 정의 운동이 목표로 삼던 방향성이 묘하게 변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렇게 시민 운동이 구조화, 정치화되는 흐름을 지켜보고 있자면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과연 ‘이런 변화의 방향은 우리 사회에 진정 유효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특히 기후 정의 운동을 펼치는 많은 시민 단체가 원자력 발전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모습은 (어떤 경우엔 이들이 반핵단체인지 기후 정의 단체인지 헷갈릴 정도로) 과연 이들이 원자력 발전에 관한 근본적인 이해가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왜 기후 정의를 주장하는 단체들이 과학적으로 탄소 배출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아온 원자력 발전 기술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기술로 여기며 대립하는 것일까? 이번 편에서는 이런 기묘한 대립의 기원에 대하여, 그리고 현재의 반핵 운동이 진정한 의미의 기후 정의 운동이 될 수 있는지 묻고자 한다.
무지로 인한 공포: <하우스 오브 다이나마이트>와 퀴퀘그의 침대
핵무기와 기후 변화가 초래할 실존적 위험 등은 종종 완전히 무시되거나 극단적으로 과장되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미디어 등에 이런 이슈들이 빈번히 노출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실제로 이 문제의 배경에 담겨있는 이론적 근거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 보니 대중들은 이런 첨예한 문제를 인식하는 점에 있어서 과학적 지식에 기반을 두고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속한 집단(특히 정치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 의 주장을 비판 없이 수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이유로 특정 정당의 정치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언론이나 인플루언서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중요한 문제들을 이미지화하고자 하고 이미지화된 구호들이 과학에 앞서 감성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게 된다. 이런 무지가 어떻게 핵 앞에서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이를 통해 극심한 공포감을 조성하는지에 관한 전형적인 모습이 최근 넷플릭스에서 화제 속에 방영 중인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나마이트>에 등장한다. 시카고를 향해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핵미사일 앞에서,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은 이성적 판단을 멈추고 공포에 잠식당한다. 이들은 미국의 안전에 치명적일 수 있는 핵무기와 관련된 행동 매뉴얼을 핵은 절대 벌어질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영화는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데, 이런 모습은 소설 <모비딕>이 그려내는 공포의 기저에 놓인 인간 심리의 원형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이슈마엘이 낯선 식인종 퀴퀘그와 한 침대를 나눠 써야 할 처지에 놓였을 때, 그는 상대에 대한 무지 속에서 스스로 공포를 증폭시키며 이렇게 독백한다. “무지는 두려움의 아버지이다.“
어쩌면 우리가 핵에 대해 느끼는 공포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핵무기’가 주는 파멸적 공포의 형상이 ‘핵‘ 기술을 이용한 원자력 발전에 덧씌워지면서, 우리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스스로 무지를 공포로 치환해 낸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인류에게 원자력 발전 기술이 없었다면?
역사적으로 석유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만들어 냈다. 문명의 기초가 된 전기도 석유와 석탄을 이용해서 만들었고 우리가 입고 쓰는 대부분 물품은 석유화학을 통해 만들어진 재료를 사용하여 저렴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인류의 문명을 주도한 화석 에너지는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기후 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그와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 원자력은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한 탄소 억제제였다.
그렇다면 잠시 공포를 내려놓고 데이터로 드러나는 과학적 근거를 냉정하게 확대해 보자. 데이터에 따르면, 만약 전 세계가 이제껏 원자력 발전 없이, 석탄이나 석유를 사용해서 전력을 대체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약 110 GtCO₂ 정도를 더 배출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현재 전 세계에서 연간 배출하는 총량의 3배 즉 대략 3년 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추가 배출이 있었다면 지구 평균온도 상승 관점으로만 생각해도 수십 년 정도가 더 빨라졌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현재 기준으로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면 2050년에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환경 문제들이 이미 닥쳐왔을 것이란 뜻이다. 좀 더 쉽게 풀어쓴다면 2025년에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극심한 폭염, 가뭄, 주요 해안 도시 (뉴욕, 도쿄, 상하이, LA등)의 침수 등이 벌어졌을 것이란 말이다. 즉, 원자력 발전 기술이 있었기에 그나마 현재 수준의 기후 문제로 버티고 있는 셈인 것이다. 이 명백한 데이터 앞에서도 원전을 ‘악’으로만 규정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솔직한 고백: 나는 왜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가?
오해를 피하고자 분명히 밝혀둔다. 나는 근본적으로 원자력을 찬성하지 않는다. 당연히 장기적으로 인류가 재생에너지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단지 그렇게 나아가야 하는 믿음의 바탕에 현재 많은 환경단체나 기후정의단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태양광이 원자력보다 더 저렴하거나, 더 안전하거나, 더 깨끗하기 때문이라는 헛된 비과학적 이유가 담겨있지 않을 뿐이다.
내가 원자력 발전을 경계하는 이유는 기술 자체가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현재의 원자력 발전 기술은 목표 사고 확률이 십만 년당 일회에 달할 정도로 안전을 확보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원자력 발전과 관련된 재난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좀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그 모든 재난에는 ’휴먼에러‘가 연관되어 있다. 즉 기술적으로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고,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인간은 언제나 실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최근의 예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비극을 되짚어 보자. 그 사고들은 설계상 결함이나 기계적 오류가 아닌, 운영 규정 위반, 안일한 대처 등 ’휴먼 에러‘가 주된 원인이 된 재앙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통해 발전해 나간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져 다시 시작할 기회가 없어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기술에 의지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기존의 대형 원전을 우려하는 진짜 이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원전 폐쇄는 대안 없이 행해질 경우 발생할 문제에 관해 심도 높은 논의와 심의를 한 이후에 실행해야 하지 않을까?
불편한 진실: 원자력 발전을 걷어찬 독일의 현실
여기서 ‘기후 정의’의 역설이 발생한다. 독일은 탈원전을 선언하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획기적으로 늘렸지만, 그 대가로 전기 요금은 급등했고 부족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석탄 발전소를 다시 가동하거나 이웃 프랑스의 원전 전기를 수입해야 했다. 어쩌면 부유한 독일은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다시 원자력 발전을 재개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도 독일 의회는 재차 원자력 발전의 영구 폐쇄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제 막 경제 성장을 해야 하는 국가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 “원전은 위험하고 화석연료는 나쁘니, 비싸고 불안정한 재생에너지만 쓰라”고 강요하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이는 선진국이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판단해서 그들이 밟고 올라간 사다리를(일종의 지름길로 통하는) 걷어차는 행위나 다름없다. 값싸고 안정적인 전기가 없다면 개발도상국들은 많은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석탄과 석유의 사용을 줄여야겠지만 현재의 재생에너지 기술로만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억제하면서 동시에 값싸고 안정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원자력 발전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진정한 기후 정의는 선진국 국민의 도덕적 만족이 아니라, 개도국의 생존과 발전을 보장하는 데 있지 않을까?
또한 선진국의 국민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에겐 재생에너지가 정의롭지 않을 수 있다. 앞서 독일의 예를 들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인 독일에서도 많은 계층에서 늘어나는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며 급증한 에너지비용은 이들의 삶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린 것으로 나타났다. 즉 더 이상 재생에너지가 값싸고 깨끗하다는 허상을 주장하면 안 된다. 비용이 늘겠지만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한다고 설득해야 하며,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계층을 어떻게 도울지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또 다른 대안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새로운 대안: 기후 ‘정의‘를 위한 현실적 도구
그렇다면 ‘휴먼에러’의 위험을 줄이면서 ‘탄소 없는 안정적 에너지’를 더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또 현재의 재생에너지 관련 기술 이외에 우리가 고민해 봐야 할 또 다른 재생에너지 기술은 없을까?
최근에 등장한 대안 기술 중 하나는 소형모듈원전(SMR)이다. SMR은 소형화, 모듈화를 통해 기존의 대형 원자로를 사용하는 원자력 발전 방식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있다. 작은 규모로 건설되고, 요구되는 안전거리가 짧아서 도시 가까이에 설치할 수 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는 전기 외에 소형모듈원전에서 발생하는 열을 지역난방에 활용하기 위해 도시 내에 SMR을 설치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기술은 안전과 비용 측면에서 개발도상국에도 적합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일조시간이 부족하거나 풍량이 충분하지 않은 국가들을 위한 다양한 재생에너지 기술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바다에 접한 국가들을 위한 파도나 조수간만차를 이용한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양수발전 역시 대규모 댐 건설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를 해결하고자 폐쇄된 수로 방식으로 건설한 후 물에 비중이 높은 부산물을 혼합해서 같은 부피의 액체(물)를 사용하지만 발전 효율이 높아지는 기술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낡은 도그마를 넘어, 진짜 약자를 위한 해법으로
기후 정의 운동은 이제 과거의 ‘반핵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1960년대 반전 운동에서 파생된 핵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2025년의 기후 해법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스웨덴 출신의 18세 이아 안스토트와 같은 젊은 활동가들은 이를 “구식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부르며, 탄소 배출이 없는 대안을 외면함으로써 오히려 화석 연료를 간접적으로 부양할 수 있다고 비난한다. 또한 반핵을 주장하는 배후에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으로 이득을 보려는 구조적 모순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런 비윤리적인 기업과 언론들이 만들어 낸 선전 선동에 스스로 회의하지 않고 무심코 휩쓸린다면 시민 사회 운동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 것이다.
진정한 기후 정의는 이념이 아니라 실존적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다. 즉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실험과 탐구를 통해 서로에게 득이 되는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인류의 미래를 위한 재생에너지의 이상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이상의 실현 과정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을 위해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비록 정치적 정체성으로 공격받더라도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는 어두운 공포의 침대에서 일어나 숨겨진 그러나 진실된 퀴퀘그의 인간적 면모를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현실의 바다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